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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사회 중 화폐부분을 공부할 무렵 무겁게 울리는 부자 소리에 훗딱 놀라 내가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현관으로 뛰어 나갔다.
우뚝 서 있는 사람.
아아, 그, 그 사람! 차림새가 변했지만 담박 알아 낼 수 있었다는 게 나는 몹시 부끄럽구나.
멀리 기적의 여운을 맘기듯 나는 그날을 고이 접어 두었다.
『실례 되는 줄 알면서 찾아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잠간 시간 내실 수 있다면…….』
찬 바람이 불어오고 그의 뒤를 따라 뚝으로 향하여 자꾸만 어줍어지는 나. 유난히 체격이 바르다고 느꼈지만 공군인줄은 생각조차 못 했는데……현관 불빛에 비친 계급장과 이름이 스쳐간다.
―대위 정 준.―
『내일이면 서울로 떠납니다. 정기 휴가는 오늘로써 마지막이 되는 군요. 왜 나오시지 않았는지……줄곧 모습이 사라지자 퍽 섭섭했습니다.
「여고 졸업반, 오 현영. S대 불문과 지망생.」하하하……어떻습니까? 이만하면 ……』
어쩌면……! 지망교까지 알다니 뭔가 내막이 큰 것 같구나.
『어떻게 제 이름을……』
『네에, 저는 정 준입니다. 현영씨에 대해서 퍽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현영씨의 담임 선생님이 제 사촌 형님이십니다. 얘기 가끔 들었지요……』
아! 그랬었구나. 정 민 선생님이 사촌 형님이시라니……으응, 그 선생님 참 좋은 분인데. 나의 학창시절 중 가장 기억에 남게 될 선생님이야, 그 분은.
안도의 숨과 함께 별나게 눈이 크신 정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담 어쩜 이분은 나에 대한 더 짙은 내막까지 알구 있을 지도 몰라.
『시며 소설이며 「씨나리오」까지 공부한다는 것도, 꽤 많은 쟁쟁한 입상을 하신 것도 아주 잘 압니다.』
선생님은 참 얄궂다. 어쩜 이런 것까지 죄다 얘기 하셨을까?
수줍음과 놀라움이 엉긴 눈동자를 어디 둬야 좋담!
풀밭을 지나 뚝 위에 섰다. 꽃과 풍차와 젖소의 나라 네델란드를 생각해 본다. 육지가 바다보다 낮은 나라. 암스테르담의 거리는 꽃거리.
어둠이 짙어 오는구나. 부끄러울 때 현영이는 곧잘 엉뚱한 생각을 해버리는 계집아이. 나는 무관심한척 해두자.
『이번 제 휴가는 뭔가 일생의 가장 큰 기쁨을 안겨 주리라 확신합니다. 입시 치른 뒤 현영씨의 회신 기다려도 좋을까요……?』
돌아 보는 눈동자에서 무언의 다짐을 보내는구나. 나는 부정도 긍정도 아닌 눈빛을 잠간 스치며 고갤 떨구었다.
이상한 사람. 그러나 밉지 않은 사람. 공연히 뜨거워지는 가슴.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음은 사모의 첫 걸음일까?
(열정? 열정이 무엇일까?
아이, 몰라. 부끄러운 계집아이.)
아아, 이 단순한 현영아. 잊어버리자. 깨끗이.
인간은 정신적으로 말끔히 성장한 후 인생의 질을 택하라고 했잖니.
하늘의 별처럼 높게 살아야 하는 거야. 밝고 순수한 빛을 띄우며.
아빤 꿈을 크게 가지랬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x월 x일
합격자 발표 날.
정 선생님이 올라 오셨다. 부끄럽잖게 우린 무사히 합격하고. 정말 기쁘다.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시는 선생님을 볼 때 나는 가슴속의 뜨거운 감사를 드리며 기대에 어긋남이 없는 내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