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백과사전 수록 내용

가톨릭복지사업

1. 서 론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사랑으로 대표되고 사회복지의 역사는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사상에서 연유한다. 그리스도교 사상의 궁극목표는 인류구원이요 인간의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이 땅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약화시켜서는 안될 것이고 오히려 그런 의욕을 자극시켜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사상은 내세중심적도 아니요 영혼우위의 사상도 아닌, 인간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함께 가진 존재로서 육체의 가치와 그 육체가 몸담고 살아 가는 현세도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게 창조되었기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존엄한 인권을 가졌고, 따라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적 노력을 사회복지라고 한다면, 비록 서로 차원은 다르다 해도 종교의 목표와 사회복지의 목표는 서로가 공통의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구약성서에서 유래되는 유태교나 그리스도교 윤리관에 의하면 사회사업의 역사는 애긍희사(哀矜喜捨)와 관련지워 시작되었다. 서구사상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양종교는 애긍시사(哀矜施捨) 함으로써 자선을 베풀도록 촉구했다. 즉, 불행한 이들과 나누어 가지라고 했다. 특히, 현대 사회사업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와 관련을 맺고있는 자비로운 행동과 자선활동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성경에 보면 여러가지 형태로 불행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도우라는 권고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 신체적으로 병들거나 불구가 된사람, 고아나 과부, 길손, 남의 종살이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구약은 특히 강조했다(출애굽기 22/21-27;21/10-12). 이와같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고 피고용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빈자들의 생존권을 유지시키기 위한 즉, 사회정의와 사회복지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신명기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수입의 십일조를 내놓아 사회복지기금으로 사용케 했다(신명기 14/28-29). 또 이때 벌써 채권자들의 횡포로 가난한 사람들이 시달림을 받는 사례가 많았던지 칠년에 한번씩 남의 빚을 삭쳐주어 가난한 사람들이 없도록 하라(신명기 15/1-4)고 했다.

그뿐 아니라 신명기는 근로자들의 정당한 품삯을 받을 권리를 강조하고, 떠돌이와 고아, 과부의 인권을 옹호하면서 부의 균등한 분배를 위해 거듭 강조하고 있다(신명기 24/14-22).

시편은 부자나 지배계층에 대해 직접 명령하기 보다 남을 돕는 행위를 찬양하고 축복함으로써 자선행위를 권장하고 있다(시편 41/1;112/5-6).

잠언에서는 마침내 가난한 사람, 피지배계층의 사람들을 돕는 것은 창조주 야훼를 높이는 것이요, 이들을 억누름은 창조주를 모욕하는 것(잠언 14/31)이라고 하여 창세기의 하느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26-27)는 말씀과 관련지워져 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떠한 위치에 있거나, 어떠한 나쁜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인간은 존엄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 적선하는 것은 야훼께 빚을 주는 셈(잠언 19/17)이라고 하면서 남을 도우는 사람은 자신이 복을 받는다(잠언 21/13;22/9)고 했다.

구약이 보는 가난의 원인은 ①게으름의 결과(잠언 6/6-11;10/4-20;20/30-34) ②무익한 잡담의 산물(잠언 14/23) ③쓸데없는 것을 추구한 결과(잠언 12/11;28/19) ④쾌락의 추구(잠언 21/17;23/20-21) 때문이라 했다. 또 가난은 하느님의 벌을 의미했으니 ①법을 어기는 자에 대한 일종의 위협(신명기 28/15-46;레위기 26/14-26) ②예언자가 죄짓는 자에게 설파한 위협(이사야 3/16-24;14/1;5/9-10) ③억눌린 자가 그들이 고발한 자를 향한 위협(시편 109/10-12) ④현자의 훈계적 판결(잠언 13/18,21,25;욥기 5/1-7;15/26-35;20/22;27/12-23)등이다.

구약에서는 가난을 악으로 생각하였고 지속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상태이며 약한 자를 비굴하게 만들고 권력있는 자들을 격상시키는 오류로 이끄는 의존과 억압의 관계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난과 인색(吝嗇)은 비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신도들은 이런 것을 시정하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도와 주도록 되어있다(출애굽기 21/1-11;22/20-23). 가난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약이 보는 부는 어떤 것인가? 우선 이 세상의 재화는 사회의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하느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신 것이지 축적하기 위한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출애굽기 16장에 나와 있는 부의 의미이다.

구약의 율법이 신약에 와서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되고(마태오 22/37-39;마르꼬 12/30-31;루가 10/27) 마침내 가난하고 병들고 감옥에 갖힌 이웃을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 자신과 동일시(同一視) 함으로서 하느님 모습을 닮은 인간 사상의 절정을 이룬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너희가 여기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고 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제자들은 신자들에게 자선을 권유했고(사도행전 10/4) 제도적인 구제활동도 벌였다. 그것은 과부들에게 식량배급 하는 일로 말썽이 생기자 이 일을 전담할 사람을 뽑게 한 것이라든지(사도행전 6/1-4) 사도들이 자선을 권유한 내용은 풍부하다. 또 이미 초대교회 때에 의연금도 모으고(II고린토 9/13) 교회가 도움을 주던 과부명단도 가지고 있었다(I디모테오 5/9). 그래서 연고자 있는 과부는 연고자들이 도와 주라고 했다(I디모테오 5/16).

신약성서에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웃사랑의 계명이나 제자들의 사상이 야고보와 요한의 편지에서 명확하게 강조되고 있다(야고보서 1/27; 요한I서 3/17-19).이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같은 차원에서 강조하고 그 사랑이 신앙의 요체라고 하였다.

결국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여타의 종교를 능가하게끔 한 인간대 인간의 관계에 관한 그의 윤리적 근본요청은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한마디 즉, "너의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말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원리는 [만인]에게 적용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품속에서 그들은 모두가 형제자매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수한 기적들은 음식을 많게 한 것이라든가 병을 낫게 한 것이다. 이런 기적들이 다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고 자신을 믿게 하려는 목적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배고픔을, 소경, 앉은뱅이의 불편을 덜어주고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었다.

2. 자선て구빈사업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일반적으로 李承薰이 청나라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1784년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천주교가 최초로 한국과 접하기는 그보다 훨씬 전인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에는 소현세자가 명나라에서 인질생활을 하던 9년동안 아담 샬(Adam Schall)과 교우하면서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세자 일행이 귀국할 때 천주교와 함꼐 서양문물이 이 땅에 들어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사상은 이승훈에 의한 천주교의 발상 이전에 이미 실학 또는 서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또는 사상으로 받아 들여져 당시 양반계급의 학자들 사이에 연구되고 전파되었다.

그리스도교 사상이 전파되자 개인적으로 그 사상에 감화되어 신앙으로 실천에 옮긴 사람도 있었으니 洪有漢의 예와 같이 천주교가 이 땅에서 시작된 이승훈의 세례 이전부터 그리스도교적 이웃 사랑의 사상은 실행되었다. 이와 같이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되기 전부터 그리스도교 사상에 입각한 자선행위는 실행되었고 이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전파되기 시작한 한국천주교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줄기차게 번져 나갔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이웃사랑을 모범적으로 실천하였으니 그 예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元베드로나 朴取得(라우렌시오)의 예 뿐만 아니라 姜完淑(골롬바)는 "비상한 정력과 활동력을 타고 났고 하늘의 특별한 은총의 도움을 받아 모든 자선사업을 고무하고 지도하였다" 하였으니 그때 이미 어떤 형태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자선사업이 이루어 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초대 한국천주교 신자들의 신심은 얼마나 두터웠던지 무서운 박해를 피해 다니면서도 신앙을 지켰고 선행을 많이 했다. 이와 같이 초창기에 모범적인 신자들에 의해 행해졌던 박애て자선사상에서 우러난 수 많은 구빈사업은 신교자유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선행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비조직적이고 개인적て일시적 자선행위로 끝난 경우가 많아 그 기록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선각적인 몇몇 사람들에 의해 일찌기 정리된 약간의 자료에 의해 살펴 보면 천주교의 빈민구제사업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음을 알 수 있다.

金玉賢(1821-1896)은 대야불(현 대구시 인교동)에 살았는데 그가 기르다 죽은 영아와 걸인들을 달성 넘어 말무덤에 손수 매장했는데 그 수가 60여명이었고 기미년 흉년에는 배고파 쓰러지는 노파들을 자택으로 업어다가 수용구호한 수가 수십명에 달했다.

徐相燉先生(1850-1913)은 사람을 대할 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어 그의 사랑에는 식객이 항상 10여명이 있었고 주일에는 수십명씩 있었는데 이들에게 용돈까지 주어가며 환대했다. 또 매년 춘추로 빈민들에게 양곡 수백석씩을 희사하여 가난한 이들의 자부가 되었다.

이러한 자선행위가 바탕이 되어 좀더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구제단체가 생겨 났으니 바로 인애회(仁愛會)가 그것이다. 인애회는 李起雲회장, 白應道회장,李啓粲회장 등이 발기하여 미사애긍을 목적으로 1917년 2월 1일 대구본당에 설립하였다. 회원은 남녀 구별없이 매 연초에 소정의 회비(당시 년 10전)를 납부하면 1년간 회원자격을 가지게 되는데 매년 이와 같이 갱신하여 회원을 모집하는 제도이었다. 사망하는 회원에게는 연미사 한대를 드려주며 전회원을 위하여 매년 생미사를 드리며 수납된 회비로 무의무탁한 노약자에게 거처할 집을 제공하며 사망시에 초상을 쳐주는 것이 인애회의 사업이었다.

빈민구제사업으로는 안성 천주교회의 孔신부(프랑스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공신부는 자신의 본국인 프랑스에 호소해서 모은 돈으로 춘추판공을 위해 공소를 방문할 때 곡식과 광목을 사다가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공신부는 또한 고아들을 모아 친히 기르기도 하고 신자집에 위탁하여 기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미약한 자료이나 계속된 빈민구제사업이 해방과 6て25를 겪는 동안 미국가톨릭구제위원회가 한국에 진출하면서 대대적이고도 조직적인 구빈사업과 사회개발사업이 펼쳐졌다.

가톨릭구제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C.R.S.)는 미국 천주교회의 주교회의 산하 공식적인 해외원조기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각지에 산재한 난민을 구호하고 전쟁희생자와 빈민을 돕기 위하여 조직된 각국의 사회사업단체들을 금품으로 지원해 주기 위해 1943년에 조직되었다.

한국의 C.R.S.는 1946년 처음으로 구호사업을 시작했으며 1952년 외원법에 의하여 외원단체로서 보건사회부에 등록하였다. C.R.S.는 자체사업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미국정부, 한국정부, 한국천주교 각교구와 협력하여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C.R.S.의 사업은 양곡사업, 의료사업, 사회경제개발사업, 지역사회개발사업 등에 대한 후원의 형태로 이루어 졌다.

양곡사업은 모자보건, 아동급식, 학교급식, 근로지원사업, 극빈자 구호사업 등이며 지역사업개발사업은 농로개설, 축산, 저수지 축조, 관개, 주택, 간척, 신용조합육성 등을 위한 직접 또는 간접원조이고 의료사업은 비타민제, 기타 의약품 등의 공급과 병원의 설립て운영을 위한 원조 및 의료기구의 지원 등이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개발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C.R.S.가 중심이 되어 들여온 수 많은 물자와 자금을 해방직후부터 6て25를 통해 피난민 구호사업의 일환으로 투입했고 미공법 480호로 들여 온 잉여양곡과 의류 등은 피난민과 빈민들에게 광범위하게 분배되어 당시 우리 국민들 중 그 혜택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종교를 초월하여 배부되었다. 그러나 1963년부터는 이 잉여농산물과 자금이 비로소 사회개발사업에 지원되기 시작했다. 한국 천주교가 196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사회개발사업을 시작한 데는 제2차 바티깐공의회의 영향이 컸다. 그것은 공의회가 인간의 현세적 생활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평가한 데서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한국 정부가 공업화 우선정책을 펴게되어 농촌인구의 도시집중화 현상이 생기게 되고 농촌이 침체되는 등 새로운 양상의 사회문제가 유발되었다. 그 중에서도 소득의 격차와 노동자 권익옹호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사회현상에 교회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농촌개발사업에 가장 큰 비중을 두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 사회에 큰 업적을 남긴 미국 가톨릭구제회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개인별 국민소득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1974년에 한국에서 철수하고 미국 가톨릭여성연합회가 주관하던 양친사업(Help a Child Program)이 구제회의 명의로 계속 활동하다가 이것 마저 중단되고 C.R.S.의 재산 일체는 한국인성회에 양도하였다.

3. 고아て양로사업

개인적이고 비조직적인 자선은 모범적인 초기 신자들 사이에 열심히 행해졌으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사회사업으로는 매스트르(Maistre) 신부의 영해회사업이 효시였다. 1854년 10월 22일 매스트르 신부가 파리 성영회 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당시 사정을 선명히 엿볼 수 있다.

"귀하의 첫번 편지를 받자말자, 내 주위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것을 알렸는데, 그때 뿐 아니라 그뒤로 여러번 그들의 눈에 감사의 눈물이 흘러 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일어나서 벌써 전 세계에 불을 붙이고 있는 그 큰 불에 비하면 저희들의 박애심은 참말이지 겨우 불똥 한개에 지나지 않습니다'고 그들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당장 산채로 거두어진 아이들을 위한 기관을 하나 세웠으면 합니다. 그러나 여기는 迫害令이 여전히 발효중에 있으므로 사람들을 그들 모르게, 또 흔히는 그들이 원치 않는데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을 일체 피하기 위하여 그 귀여운 어린 아이들을 신자가정에 나누어 주어 그들이 나이 차서 다른 보살핌이 필요할때까지 먹이고 키우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다음에는 그들에게 생업을 가르치고 신자들이 그들의 일자리를 알선해 줄 것입니다. 나는 특별히 이 사업을 맡은 代洗주는 사람 3인을 임명하였고, 또 여인들이 흔히 아주 어린아이들에게 접근하기가 더 쉬우므로 이를 위하여 여인 2명을 지명하였습니다. 이 숫자는 사업이 발전함에 따라 증가될 것입니다. 비용이 다른 나라에서 보다 약간 더 드는 것으로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것은 생활필수품이 다른데 보다 비교적 비싼데서 오는 것입니다. 가령 지방에 맡길 수가 없어 서울에서 유모에게 맡겨야한 하였던 아이들을 위하여 각각 매달 8프랑씩 지불해야 하였습니다. ててて어린아이들을 구원하시는 主는 당신의 거룩한 사업에 풍성한 축복을 내리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저희들의 모든 권고에 그렇게도 자주 귀를 막고 자기들 자신의 행복에 무감각한 저 가엾은 미신자들의 아이들 만이라도 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소서."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1854년 이 편지의 발신일인 10월 22일에는 이미 이 땅에서 영해회사업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매스트르신부의 입국이 1852년 2월8일이었고 1853년2월3일 페레올(Fereol)주교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年長 宣敎師로서 매스트르 신부가 부주교로 교회일을 지휘하면서 교회사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1853년에는 주목할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니 1854년 매스트르 신부가 편지를 보낸 그해에 영해회 사업을 시작한 듯하다. 그러나 매스트르 신부는 이 편지 이전에 영해회사업을 시작하고서 바로 불란서 본부에 보고겸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는 그 다음 편지임을 알 수 있다.

영해회의 자세한 성격은 3년후 뵈르뇌(Berneux) 장주교가 1857년 8월2일자로 반포한 [張主敎輪示諸友書](이것은 筆寫本으로 오늘에 전해져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에 [영해회규칙](부록참조)을 실어 각처 公所의 회장집에 비치하여 누구든지 볼 수 있게 했으니 그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영해회규식]에 의하면

1) 목적: ① 죽을 위험이 있는 외교인 아이들을 代洗받게 하는 것.

② 의탁할 곳 없는 외교인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

2) 방법: 신자가정에 분산 양육(박해 때문)

3) 대상: ① 고아

② 고아아니라도 기를 능력이 없는 부모에게서 위탁받은 아이.

4) 조건: 남아 6세 이상, 여아 8세 이상은 위탁받지 못함.

5) 양육을 신자가정에 위탁할 때의 조건

① 2돌(2세)이하의 아이를 젖없는 사람에게 맡기지 못함.

② 한사람에게 둘이상을 맡기지 못함.

③ 남아는 18살이 되면 자유로 그 집을 떠날 수 있다. 만일 그 집에 그냥 있게되면 다른 머슴과 같이 노임을 주어야 한다.

④ 여아는 20살 전에(신부 허락을 받아) 결혼시켜야 한다.

⑤ 아이들에 대한 전권은 신부(교회)에 있다. 따라서 신부판단에 아이양육에 부적합하다고 보면 언제든지 데려올 수 있다.

⑥ 맡은 아이를 친자식 같이 키울 것. 종교교육도 시켜야 함. 영해회의 은혜를 일깨워 주고 신부에게 속해 있음을 알려주고 公所에는 따로 신부와 면접시킬 것.

⑦ 恩錢은 2살까지는 양육비가 많이 들고 기르기에 힘든다는 점을 감안해서 연간 24량으로 가장 많고 2살부터 10살까지는 17량, 10살부터 12살까지는 대폭 줄어 연간 6량, 12살이 넘으면 은전이 없다. 이 은전에는 피복비가 포함되어, 따로 피복비는 지급하지 않고 아이가 죽으면 장례비를 별도로 1량 지급한다.

6) 입양 규정

맡아 기르던 아이를 양자로 삼고자 하면 신부와 의논해서 하되 은전은 보통의 절반이요, 장례비는 없음.

7) 이 [규식]을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각처 회장집에 비치토록 했다.

이 [영해회규식]은 장주교가 司牧書翰 형식으로 실렸는데 이 서한은 공주지방교회에 보낸 것으로 각공소 회장들은 이를 베껴두어 누구든지 볼 수 있게 하라고 했다. 그 후로 전라도로 보내어 그 쪽에서도 모든 공소에 傳書케 하라고 했다.

영해회규식이 정한 조건에 따라 아이를 맡길 때도 증인 1인과 連署로 영해회의 모든 조건을 따르고 아이를 다시 찾지 않겠다는 일종의 친권포기의 서약서를 2부 작성하여 1부는 회장이 보관하고 또 1부는 신부가 보관하도록 했다. 만일 서약을 어겨 아이를 다시 찾고자 하면 1개월에 2량씩 양육비를 물어주도록 했다.

1개월 2량이면 은전이 연간 2살까지 24량이니까 실비 변상을 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규식에 의하면 은전은 12살까지만 주고 18살부터는 다른 머슴과 같이 私耕을 정해 주어야 한다고 규정하여 12살부터 18살까지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것은 12살이 되면 어느정도 노동력이 있으므로 자신의 생활비 정도는 일을 한다고 보고 언급하지 않은 듯하다. 이것은 도제제도에서 기술을 배우는 동안 생활비나 수업료를 지불하지 않고 스승의 집에서 묵으면서 기술을 배우고 따로 노임을 받지도 않은 제도와 비슷하다 하겠다.

은전 지급은 매월 또는 몇달마다 신부가 정하는대로 다르되 先下는 없고 언제나 후급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또 기르던 아이를 양자로 삼았을 지라도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신부가 다시 아이를 데려올 수 있다고 했으니 아이들에 대해서 신부는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뇌(Berneux)주교가 1859년 11월7일자로 布敎 聖省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이 때 영해회사업 기금으로 기르던 고아의 수가 43명이라고 보고했다.

이 사업은 1866년 병인대박해 때 장주교가 순교한 후 중단되고 말았다.

여기서 영해회사업을 평가해 보면

현대 사회사업의 특징을 ① 치료적인 면보다 예방적인 면을 ② 과학적이고 전문기술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③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사업이며 ④ 물질적인 구제보다 정신적 방향, 즉 물질 대신 지혜를, 돈대신 직업을, 다시 말해서 자조자립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데 두고 있다면, 영해회는 아이들을 단순히 기르기만 했을 뿐만 아니라 장래 성장해가는 사회인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기술 또는 직업교육을 실시했으나 이 때의 영해회사업은 이미 훌륭한 현대적 사회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업은 매스트르 신부의 편지 내용에서 알 수 있으니, 즉 매스트르 신부는 {아이들이 성장해서 다른 보살핌이 필요할 때까지}라고 하여 철들 때까지 기른 후 그후 다른 교육적인 배려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이 다음에는 그들에게 생업을 가르치고 신자들이 그들의 일자리를 마련해 줄 것}이라 했으니 아이들의 장래 일에도 충분히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해회사업은 비록 박해로 인해 신자들 가정에 위탁양육을 했다고 하나 결과적으로 사회복지 내지는 아동복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선구적인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1850년 이후 유아원과 같은 시설에 많은 아동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방법에 대해 여러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가정에서 보호하는 제도가 점차 발달했다. 이것은 위탁할데 없는 아이들을 신뢰할 만한 가정에 위탁하여 그들을 성실한 생활로 인도하는 방법을 강구하려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점차 발달하여 1880년대에는 아동들과 위탁가정을 일반의사, 심리학자, 정신과의, 사회사업가등이 상세히 조사하여 서로가 적합한가를 판단한 후 결정했으니 완벽을 기하고자 애쓴 제도라 하겠다. 그러나 당시 우리의 형편은 미국과 같이 발전된 제도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기적으로 거의 동시대에, 결과적으로 비슷한 제도를 실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를 끄는 일이라 하겠다.

여하간 영해회는 아이들에게 소위 시설병(Hospitalization)에 대한 나쁜 결과를 예방할 수 있었고 철들 때까지 양육하고 그후부터 생업을 위한 기술교육을 실시했고 마침내 나이가 차면 적당한 일자리를 알선해 주었으니, 이는 훌륭한 현대적 사회사업이었다 하겠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던 박해가 어느정도 가시고 우리 정부가 서방 여러나라와 수교조약을 締結하면서부터 천주교에 대한 부분적인 허용이 있게 되었고 1886년 韓佛修交條約의 체결로 信敎自由가 명문화되었다.

이때 조선교구장 白블랑(J.BLanc) 주교는 정부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노쇠자와 병자, 고아들을 구제하고자 양로원과 고아원을 시작했다.

1880년부터 이미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구제하여 女敎友나 자식이 없는 교우를 물색하여 기르게 하고 보육료를 주었으니 이미 20여년전 영해회가 하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고아들을 돌보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서울 곤당골(미동= 현 을지로 1가 미대사관서측)에 기와집 한채를 사서 영해원을 설립하여 무의무탁한 아이들을 받아들여 열심한 겨우 몇 명에게 이들을 보육하게 하였다.

그후 1885년 3월15일에는 곤당골에 기와집 세 채를 사서 남아, 여아, 그리고 직원들이 각각 한 채씩 쓰고 정식으로 [천주교고아원]이라 이름짓고 제1대 원장에 백주교가 취임하였다. 당시 남자 아이들이 사는 집을 남당이라 불렀고 80명을 수용했으며 여자아이들이 사는 집을 여당이라 불렀고 60명을 수용했다. 남녀 두 집엔 주방, 세탁소, 보육, 간호, 교사 등 各部面에 사람을 두었는데 2년간 운영하는 동안 경비가 너무나 많이 들어 더이상 이 사업을 계속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한편 종로 똥골(동곡= 현관철동)에도 큰 기와집 한채를 사서 의지할 곳 없는 남녀노인들 40명을 모아 수용하였다.

이것이 한국최초의 고아원과 양로원이었고 고아원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으나 양로원은 그후 鐘峴으로 옮겼다가 1894년 이후 한때 폐지되기도 했다. 그후 1924년 종현의 몇몇 유지 신자들이 [애긍회](哀矜會)를 창립, 무의무탁한 노인들을 거두었으니 양로원이 다시 시작되었고 1931년까지 8년간 경비가 8천여원에 수혜연인원이 96명이나 되었다.

여하튼 당시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하여 20명의 교우들이 보살피게 했으나 원래 큰 희생이 따르고, 교육도 받지 않은 일반신자들로서는 큰 효과를 얻기가 어려웠고 또 이들에게 지급되는 매달 월급도 큰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백주교는 신부들과 의논하여 다른 나라와 같이 수녀들을 초청하여 이 사업을 맡기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백주교는 1888년 봄, 불란서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總長修女에게 수녀를 청하는 서한에서

"<前略> 우리는 교우거나 외인이거나 물론하고 불행한 조선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돕고자 하는 목적으로 양로원을 시설하고 길가에 버린 바 되어 배고픔과 추위로 죽음외에 다른 가망을 갖지 못한 남녀노인들을 거두어 수용하였으니 현재 양로의 수는 40명에 달하였나이다. 우리는 이 양로원과 더불어 영해원을 시작하여 서울 길가에 흔히 버려진 불쌍한 고아들을 거두어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함께 구하고자 하였사오니 수용된 고아의 수효는 백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나이다.

이만한 사업을 훈련없는 여교우들로 하여금 경영하게 함에는 실로 곤란한 문제가 많은지라, 그렇지만 않다면 능히 두배의 아동들을 수용할 수 있겠나이다. 비록 남녀교우들이 좋은 마음으로 돕는다 할지라도 내용의 발전을 위하여 혁신할 것도 많고 정돈할 것도 많습니다.ててて<後略>"

이렇게 해서 한국에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가 진출하게 되었고 1888년9월8일,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에서 [천주교고아원]을 인수하여 수도회 부속사업으로 경영하게 되어 제2대 원장에 쟈카리아수녀가 취임하였다.

그때 남자 아이들은 일찌기 백주교의 주선으로 상점, 약국, 목공소, 철공소등에 둘씩 나가서 각각 기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장난이 심하여 잘 배우지 아니하므로 수녀원에서 관리한 후부터는 모두 불러들이고, 고아원내에서 교육하기 시작했다.

수녀들은 선생 둘을 두어 한 사람은 한문과 국문을 가르쳤고 또 한사람은 八系치기(주머니끈) 등을 가르쳤으니 고아들의 교양교육과 실업교육을 병행했다.

수녀들은 고아들을 모아 단순히 기르는 일 뿐만 아니라 성장한 수 사회인으로 정상적인 진출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길러주는데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성장하여 결혼하고 출가한 후에도 유대를 가지고 계속 보살펴 주었다.

당시 한국의 사회실정은 가난과 흉년, 전염병 등으로 기아, 고아가 많이 발생했고 정부나 사회에서 이들을 위한 시설을 갖추지 못했으니 자연히 [천주교고아원]에 몰리는 숫자는 많았고 수녀들은 일정한 수입원이 없이 이런 사업을 계속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천주교고아원 제3대 원장 가밀수녀는 1915년 모금운동을 벌여 자선권 1천장을 팔았다. 이 자선권은 1枚에 1원씩 했는데 당시 한국에 와있던 서양사람들, 특히 그 부인들이 한꺼번에 수십장씩 사갔기 때문에 몇달만에 자선권 1천장이 매진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밀원장수녀는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1915년 11월27일 다과회를 베풀고 고아들이 만든 수예옷, 상보, 수건, 손가방등을 제비뽑아 선물했다. 이것이 기록에 나타난 한국 최초의 바자(Bazzar)라 할 수 있는데 이 사업으로 재료와 수공값 5백여원을 제하고도 몇 백원이 남게 되어 고아들 며칠 양식이 되었다고 한다.

가밀원장수녀는 그후에도 1925년, 1926년, 1927년에 세차례에 걸쳐 고아원 운영과 원사 개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바자회를 더 개최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 5년간, 그리고 전쟁후에도 수녀원과 고아원의 궁핍은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 기간동안 Saint-Enfance에서 고아들을 위해 보내주던 돈이 줄고 또는 끊기기도 해서 큰 수입원이 없는 수녀원에서는 150명이 넘는 고아들을 먹여 살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당시 고아원 수용아동과 경비는 1910년대부터 인원수에 비해 경비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은 물가고가 심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늘어난 경비에 비해 성영회본부 지원금은 적었으니 그 어려움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뜻있는 사람들의 모금운동이 전개되었으니 당시 경향잡지사 사장으로 있던 韓신부는 강론이나 글로 고아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라고 호소했다. 매달 두번씩 발행되던 경향잡지에 고아들의 곤란한 생활상을 소개하고 은인들의 선심도 함께 소개했다.

수녀들이 운영하던 고아원은 그후에도 계속 경영난을 겪어오다 1943년 1월부터 제2차 세게대전의 영향으로 더욱 운영난이 심해져 만13세 이하의 아동에 대해 정부구호령에 의한 구호비를 지급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수녀들은 1926년 원사를 새로 지었고 1943년에는 영아부를 특설했으며 1945년에는 현재의 명동 자리에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고 이름을 성바오로보육원으로 바꾸었다.

1888년에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에서 맡고부터 [천주교 고아원]은 날로 수용인원이 늘어 1936년에는 경성부 元町에 있는 분원을 설치해야 할 정도였으며 1945년 5월28일 현재까지 연수용인원 4,307명(남아 1,344명, 여아 2,963명)이 되었다.

수녀들이 한국에 진출한 후 수녀회가 뻗어나가는 데는 고아원도 언제나 함께 생겼으니 1894년 8월 18일에는 인천에 수녀회 분원을 설립하면서 고아원과 施藥所를 함께 시작했다. 마침 초대분원장 클레망수녀는 똥낑 서양군대병원에서 여러해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 병자간호를 잘해 환자들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고 한다.

1930년 한햇동안 경성과 인천 두곳 시약소에서 치료해준 환자 수가 16,724명, 재가치료환자수가 6,616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인천에 시약소가 설치되었고 동년 가을부터는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하여 고아원도 시작되었다.

1915년 10월15일에는 대구 바오로수녀원에 고아원을 부설하였으니 지금의 白百合保育院이 그것이며 1932년 10월5일에는 전주 수녀원에 부설 영해원을 설립했고 1946년 2월에는 부산 범일동성당에서 본당주임 정재석 신부가 해방과 함께 귀환한 동포들로 주거와 양식의 극심한 곤란속에서 고아들이 거리에 범람함을 보고 이를 구제코자 20여명의 고아들로 소화보육원을 발족했다. 小花保育院은 1951년 10월1일에는 대지 55평, 건평 30평, 병실 4개, 병상 12개, 의사 1명, 간호사 4명으로 데레사의원을 개설했는데 이 의원은 일반진료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소화보육원의 고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소화보육원 부설의원의 성격으로 출발했다.

대구 백백합보육원은 그후 1969년 8월1일 영해원으로 목적을 변경했고 동년 9월1일에는 대구시 미て기아일시보호소를 병설했고 또 1977년 3월18일에는 입양사업기관으로 인가를 얻었다. 백백합보육원의 이같은 변화는 6て25동란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아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또 고아들의 성장후 사회진출문제등의 어려움이 많고, 그뿐 아니라 외원의 감소로 정부보조를 받을 수 있는 나이가 지난 아이들의 양육 및 교육비등 재정적인 어려움이 함께 작용한 것이다.

이상에서 주로 고아원사업을 1880년부터 해방까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았고 양로원 사업은 기록이 거의 없는 형편이고 또 초기에 설립됐던 양로원이 현재까지 존속하지 않고 있다.

다만 1921년 4월1일에 설립된 인천교구의 聖家養老院이 현재까지 존속하는 가장 오래된 시설이다.

이와같이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온 즉시 처음 착수한 사회사업이 고아원과 양로원 사업이고 이 또한 한국 최초의 현대적 사회사업으로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다만, 초기의 신자가정에 맡겨 기르던 결연사업이 1880년대에도 있었으나 고아원시설이 생기고부터 더 발전하지 못하고 없어진 것이 몹시 아쉽다.

 

4. 救癩事業

한국천주교회가 구라사업을 처음 시작한 것은 해방직후 서울 근교에 수두룩했던 부랑 나환자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한 安캐롤주교가 1948년 현재의 나자로원 자리에 있던 당시 세브란스병원부속 결핵요양소를 사들여 성나자로요양원을 설립하고 몇 10명의 부랑나환자를 치료한데서부터 비롯된다.

그후 본격적인 구라사업을 벌이게 된 것은 1955년 미국 매리놀회 스위니(徐요셉)신부가 한국에 오면서부터였다. 스위니 신부는 오랫동안 중국본토에서 진료 및 구호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다가 재가환자들을 찾아다니는 이동진료의 어려움을 느껴 이들이 일정한 지역에 모여살도록 정착촌을 만들게 되었는데 1961년부터는 정부도 음성나환자(치료된 나환자)들을 위한 정착촌을 만들어 주게 되었고 그것이 1980년 10월 31일 현재 전국에 98개 정착촌이 생겼고 그중 40여개가 천주교구라사업과 관련을 맺고 있다.

1980년 10월31일 보사부에 등록된 전국의 나환자 수는 28,122명으로 그중 13,613명이 재가치료를 받고 10,089명은 정착촌에 살고 있으며 4,420명이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또 나환자들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경북 7,273명, 전남 6,059명으로 경북, 전남 두 지역 환자가 전국의 절반이 된다. 그리고 경남 4,727명, 전북 3,427명으로 경상도, 전라도가 합쳐서 21,486명으로 전국의 76%가 이 지역에 살고 있다. 나환자 정착촌이 이 지역에 몰려있어 그런 결과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 정착촌이 72개로 전국의 73%가 이 지역에 몰려 있는데 이것은 기후조건이 환자들에게 가장 좋은 지방이라 나환자들이 이 지역에 몰리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그러다가 1967년 전국에 산재하여 같은 목적으로 구라사업을 하고 있던 성직자, 수도자, 평신자들이 상호 유기적인 협조아래 구라사업을 함으로써 함께 연구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중복된 구호를 없애고 애로사항을 공동으로 해결해 나가며 정부나 나협회등 유관기관과의 협조등을 목적으로 가톨릭라사업가연합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동연합회의 회원단체는 8개 기관으로 서울의 가톨릭만성병연구소와 서울천주교구라회가 있고 경기도 시흥의 성나자로원, 대구의 파티마병원과 경북 칠곡가톨릭피부과의원, 영주시의 다미안의원, 경남산청의 성심인애원, 전북의 이리성모병원이 회원기관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조직된 가톨릭라사업가연합회는 기본 사업으로 ① 나병계몽사업 ② 의료사업 ③ 교육사업 ④ 자립사업 ⑤ 불구환자 수용보호사업 ⑥ 후원회육성사업등을 벌이고 있다.

동연합회는 오지리 가톨릭수녀회와 서독구라협회와 관련을 맺고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있다.

오지리 부인회는 사회복지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기관, 구라사업단체 및 양로원 고아원등 사회복지시설에 재정원조를 하여주므로 이들 기관이 목적한 바를 조기에 달성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동부인회는 교육사업,(사회, 농업, 가내수공업등) 개발사업, 의료사업, 구라사업, 난민구제사업, 양로원, 고아원등의 운영비 및 시설비 지원사업등을 기본사업으로 삼고 있다.

동부인회가 한국에 첫사업을 벌인 1958년부터 1978년까지 21년간 한국지부를 통해 이러한 구호사업을 벌인 총금액은 18억여원이나 되고 그중 교육사업과 구라사업에 지원한 금액이 전체의 반이나 된다.

그 중에서 구라사업에 지원한 금액은 4억여원으로 전체 지원금의 22.5%를 차지한다.

서독구라협회는 구라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의료기관, 계몽기관 및 음성나환자 정착촌등 복지시설에 재정지원을 하여 각기관의 목적한 바를 조기에 달성하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 단체는 원칙적으로 직접 사업을 하지 않고 현금등 재정지원을 주로 하나 세계 각국의 나사업에 관한 자료교환 및 계몽을 위한 출판사업, 나병연구사업등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목적을 가진 동단체는 주된 사업으로 정착촌 자립사업, 의료사업, 나이동진료반 사업, 교육, 연구, 시설설치 및 유지, 계몽,(환자자녀) 복지, 불구환자 수용보호등 사업에 재정지원사업을 벌여왔다.

동협회가 1959년부터 1977년까지 한국 구라사업에 지원한 내용은 만 19년동안 총 16억여원의 자금을 투입하여 정착촌 자립사업과 나병진료등에 주로 지원사업을 벌였다.

그외 국내의 구라사업 후원운동으로는 구라주일행사와 릴리회를 들 수 있다.

1968년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는 [세계 나병의 날]인 [정월 마지막 주일]을 [구라주일]로 선포하고 매년 이날에는 전국 각본당 및 가톨릭기관을 대상으로 나병에 대한 계몽과 구라사업에 협조를 호소하고 가톨릭기관을 대상으로 나병에 대한 계몽과 구라사업에 협조를 호소하고 주일 미사때 헌금을 받아 가톨릭 나사업과 연합회의 각종 사업에 사용케 하고 있다.

구라주일이 실시되고부터 1971년까지는 기록을 구하지 못해 알 길이 없고 1972년부터 보면 1972년 구라주일 헌금이 230만 여원이었던 것이 1980년에는 4,700만원으로 증가했다. 그뿐 아니라 각 교구의 연도별 구라주일헌금 내용을 보아도 매년 평균 약 48%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어 구라사업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과 반응이 꾸준히 좋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 1월 제3회 구라주일을 맞아 가톨릭 나사업가연합회가 가톨릭신문에 게재한 구라계몽광고를 보고, 당시 한국은행 부산지점에 근무하던 김광자양이 약간의 선물을 마련, 칠곡 가톨릭 피부과 병원을 방문했다가 너무나 많은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음을 보고 빈약한 선물을 도저히 내놓을 수 없어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후 김양은 동료 여행원들과 어울려 이야기하던중 우연히 이 사실을 털어 놓았다. 이 자리에 모였던 아가씨들은 즉석에서 작은 돈이지만 정기적으로 모아 나환자들을 돕자고 결의하고 최초로 20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당시 서울에 있던 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로 보낸데서 오늘날의 릴리회가 탄생되었다. 그 이름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모임"이란 뜻에서 "릴리"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릴리회는 당초 1인당 월회비 5백원으로 시작, 한달에 담배 한 값, 차한잔 절약하여, 우리의 형제요 자매인 불우한 나환자들을 우리힘으로 도와보자는 숭고한 민족애의 운동으로 누구나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당시 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가 서울에 있어 부산의 아가씨들이 서울로 매달 송금하기가 힘들어 한국은행 서울 본점의 이은숙양이 매달 회비를 대신 전달하는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이양은 이 심부름을 하던 중 당시 동연합회장 玄신부의 구라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아 한국은행 본점에서도 릴리회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1971년에는 회원이 64명으로 늘어 났다.

이렇게 아가씨들의 좋은 뜻이 한두사람 전해져 회원수는 급격히 늘어 났으니 1972년에는 344명, 1973년에는 434명, 1974년에는 459명으로 증가했다. 매년회비도 늘어나 시작되던 해 122,000원이던 것이 5년만인 1974년에는 1,947,850원으로 증가했다.

1975년부터는 회원 수도 많이 늘어나 개별회원 수는 파악할 수가 없고 단체별, 개인별로 혼합 기록되어 있어 자세히 파악할 수가 없었으나 회비가 3백만원이 넘었고 1976년에는 1천만원을 육박하게 되었으니 그 회원 수는 급격히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매년 신장세를 보인 릴리회는 만 11년만인 1980년에는 회비총액이 66,525,628원이 되었고 구라주일헌금과 합하여 순수 민간운동모금으로 들어온 성금이 1억원이 넘게 되었다.

릴리회 회원의 직업별 분포는 금융기관이 31%를 차지해 최초 한국은행에서 생긴 때문인지 은행가에 제일 많이 보급되어 있고 다음으로 종교계 19%, 기타 일반단체 15%, 개인 13% 순으로 되어 있고 그 밖에도 의료계, 언론계, 정계, 법조계 등 광범위하고 다양한 직업별 회원분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모여진 릴리회의 성금을 되도록 많은 환자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기 위해 시설지원보다 환자 개인에게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래서 ① 손발이 없는 나환자에게 의족수 지원 ② 갖가지 신체적 장애로 사회복귀가 어려운 자에게 성형 및 정형등 재활수술비 지원 ③ 각종 대수술비 지원 ④ 전국에 산재한 나환자들의 진료비 지원 ⑤ 나환자 자녀 교육을 위한 장학금지원 ⑥ 자활능력이 없는 무의무탁한 자들을 수용소에 보호조치 ⑦ 기타 나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사업비 지원등에 주로 쓰인다.

1970년부터 1980년 10월31일까지 릴리회의 지원사업 현황은 眉毛이식이 2,286명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장학금 742명, 의족수 646명으로 지원했으며, 특기할 일은 지금까지 외원에만 의지해 오던 시설비에도 1980년도에 처음으로 지원을 해 칠곡 가톨릭피부과병원에 진료용시설 신축비를 도왔고 교육회관 건립비도 한 곳에 지원을 해서 구라사업의 토착화에 밝은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또 릴리회 지원사업을 금액별로 보면 1978년 역시 미모이식수술이 제일 많아 38,090,5000원이고, 다음으로 시설비지원이 9,500,000원, 의족수 지원비가 8,248,000원이다. 그리고 릴리회 성금이 증가해 감에 따라 지원활동도 매년 증가해 큰 활기를 띠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5. 천주교 사회복지사업의 재원

1) 교회예산에 나타난 자선비

사랑의 교회로 자처하면서 신자들에게 이웃사랑을 가르치고 교회의 이름으로 많은 자선과 사회사업을 베풀어 온 교회가, 교회의 공식예산에 어느정도의 이웃사랑에 비중을 두고 있는 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급까지 베풀어온 많은 자선 또는 사회사업의 재정은 신자들의 자발적인 성금 또는 개인 독지가들의 희사금 또는 외국의 원조등으로 충당해 왔다. 사실 천주교회는 교회유지 및 운영을 위한 신자들의 책임의식이 부족해 기본예산으로 복음선포 및 典禮를 위한 비용충당에 급급해 까리따스, 즉 봉사를 위한 예산에까지 힘이 못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먼저 천주교의 교회재정에 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주교회는 신자들에게 각자 능력과 양심에 따라 교회운영을 위하여 재정적인 부담을 져야할 책임이 있다고 가르친다. 교회법에 의하여 모든 신자들은 형편대로 교무금을 납부하고 있으며 교회는 교무금과 헌금(捐補돈)을 바탕으로 예산을 세우고 예산에 따라 교회를 운영한다.

이러한 교무금제도가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시행된 것은 정확히 언제부터인가는 알 수 없으나 교무금이란 말은 1920년경부터였고 그 전에는 지방에 따라 공비전. 판공전, 공소전등으로 불려진 같은 내용의 재정적 부담을 신자들이 감당해 왔다.

1921년-1925년 사이에는 교회자립을 위해 신자가정마다 쌀 한 숟가락을 줄이는 성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10년 경향잡지는 공보란에서 "거년 한국 예수교인들이 교회를 위해 낸 돈이 22만5천8백89환 13전인데 천주교인이 여러모양으로(미사전, 공소전, 다른 돈) 낸 것은 겨우 6-7천원 밖에 안되니 교우가정은 覺할지어다."고 신자들의 교회운영의 관심을 추구했다.

교무금을 각자 형편에 따라 등급제로 실시한 것은 1927년 충남 합덕본당에서 白필립보 신부가 처음 도입했다. 백신부는 이때까지 대인 1인당 연30전으로 일률적으로 정해진 교무금 책정이 공평치 않다고 하여 본당 산하 공소에 公翰을 보내 살림형편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거둘것을 제시했다. 다음해 결산을 해보니 전년에 비해 전체액수가 3배가 늘어났다고 했다. 합덕본당의 등급제 실시 결과본 교구장 뮈뗄 閔주교는 전국본당에 대해 등급제를 실시할 것을 지시, 이때부터 각 본당이 등급제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등급제이후 1930년대 중부지방의 교무금 액수를 보면 대개 연간 쌀1말에서 3말 사이로 형편이 좀 낳은 가정이 연 3말이고 대개 1말 정도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의 재정적 자립은 요원한 일이었고 대부분을 외원과 로마 교황청의 보조금으로 운영해 왔다. 그러다가 1962년 한국교회가 자치지구로 설정됨에 따라 신자들의 책임은 무거워 졌고, 한국정부의 여러차례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이 성공을 거두어 국민 1인당 GNP가 높아짐에 따라 교회에 대한 외원도 점차 줄어들거나 완전히 끊겨 버리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신자들의 재정부담이 적어 교회운영에 대한 관심도 적었고 따라서 교회 살림살이를 알고자 하지도 않았고 또 알릴 필요도 없었으나 이제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하게 되니 그 살림규모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교회재정형편이 어려우니 자선비 같은 항목은 설정하기 힘들고 최소한의 경상비 충당에 급급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공식적인 교무금과 예산에 의한 교회운영이 최근에 와서 비로소 시작되었고 그것마저 앞에서 누차 지적했듯이 발표된 자료의 부족으로 전체적인 경향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최근 대구대교구가 1979년과 1980년의 예산안을 교구총람에 공개한 바 있어 이를 근거로 몇 가지 경향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 자료에 의하면 교구 예결산에는 자선비가 없고, 본당 예산에는 거의 모든 본당에서 자선비 계정을 가지고 있다.

대구시내 24개 본당중 1979년에 자선비 계정을 가진 본당이 19개였는데 1980년도 예산에는 25개 본당중 22개 본당이 자선비 항목을 두어 3개 본당이 늘어 났다.

대구시외 본당은 1979년도에 21개 본당중 13개 본당이 자선비를 책정하여 불과 62% 정도였는데 80년도 예산에는 16개 본당이 자선비를 가져 76%로 증가했다. 결국 시내 본당은 1979년에 79%가 자선비 계정을 가졌고 1980년에는 88%가 자선비를 책정했다.

pp.67-68 중략

예산에 반영된 자선비를 분석해 볼때 각본당 단위로는 자선비 자체가 너무 적어 계획적이고, 조직적 체계적 복지사업을 벌이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형편이고, 대개 지금까지는 본당 관할 내에 거주하는 극빈자를 몇 가정 선정해서 연간 1-2회씩 약간의 금전이나 식량을 도와주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도 예산에서 몇몇 의욕적인 본당이 보여준 높은 자선비는 단계적으로 조직적 복지활동을 벌일만 하다고 하겠다.

여기서 한가지 관심있게 보아야 할 점은 전체 예산이 큰 본당이 자선비도 많이 책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지역 신자들의 경제사정이 좋은 본당은 자선비도 많고 가난한 지역 본당은 자선비도 적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대구시내 또는 대구교구 전체로 보면 교회의 자선비 혜택이 공평하게 미치지 못하고 더욱 가난한 지역에서는 혜택이 적고 덜가난한 지역에는 혜택이 크다는 모순된 결과를 낳게 된다. 이와같은 제사정을 감안해서 교회 자선비의 효율적인 집행 방안을 찾아보면

① 각본당의 자선비 예산은 당년에 다쓰지 않더라도 결산때는 별도 자선비적립금으로 저축할 것.

② 대구시내 또는 대구교구를 하나로 묶어서 집행한다.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대로 같은 대구시내라 하더라도 시내 중심지 본당과 변두리 본당의 경제적 격차가 심하다. 즉 중심지는 예산은 많고 구빈대상자는 적은데 반대로 변두리 본당지역은 자선비 예산은 적은데 구빈대상자는 상대적으로 많다. 만일 지금처럼 본당마다 독립된 체제로 집행한다면 덜가난한 사람은 많은 혜택을 받고 더욱 가난한 사람은 적게 혜택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③ 교구 仁成會를 활성화시켜 본당 자선비를 인성회기금으로 입금시킨다.

인성회의 설립취지대로 교구인성회가 제기능을 발휘한다면 본당마다 인성회를 조직하고, 본당 인성회는 극히 적은 예산으로 긴급구호만 하고 본당 관할내의 구빈대상자를 인성회 교구본부에 보고하도록 한다. 교구인성회는 각본당에서 보고되는 자료를 분석, 평가하여 우선순위와 구호의 정도를 정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교구인성회 전체예산을 집행한다면 교구내(또는 대구교구 만이라도) 구빈사업에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본질에 있어 봉사의 직분을 다해야 하고 사랑의 교회임을 재인식하여 구빈 또는 교회사회사업의 재정을 신자들의 자선심에만 호소할게 아니라 교회의 공식예산에도 상당한 수준으로 반영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때 신자들에 대한 이웃사랑의 모범을 보일 수 있고 대사회적으로도 참으로 사랑의 ?據者라 자처할 수 있을 것이다.

2) 모금운동을 겸한 인성회활동

교회의 사명은 Kerygma(Evangelisatio:복음선포)와 Liturgia(Eucharistia:典禮)와 Diaconia(Caritas: 愛德て奉仕)의 3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Caritas: 奉仕 즉, 주님의 백성이 당하는 모든 문제는 우리 모두의 관심사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구원"이라 할 때의 그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결합체인 전인에 대한, 그가 처한 온 세상의 구원이어야 하며 우리의 이웃사랑은 전인에 대한 봉사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Caritas는 교회의 혼(The Soul of the Church)이며 교회 초창기부터 주교는 祝聖될 때의 불우한 형제들에게 애덕을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Caritas의 명칭은 인성회, 인보회, 진애회(대만), 가톨릭사회복지회등 국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지만 그 조직이나 기주로서의 까리따스의 임무는 경제, 사회, 윤리, 정신, 신앙적인 전인간 생활분야에서 개인이나 단체에 대한 봉사로 그들로 하여금 {보다 인간다운 조건으로 이끄는 것}(to make from less human to more human condition)이다.

이러한 까리따스는 전세계에 걸쳐 자유진영 거의 모든 나라에 조직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1975년 6월26일자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산하 전국직속기구로 인성회란 이름으로 설립을 결의하고 구호, 자선, 복지 및 개발사업에 대한 교회 전담기구의 기능을 부여(헌장 4조)하고 필요한 자원을 조달할 임무를 맡겼다.(헌장 4조3항 및 11조 3항) 한국인성회의 구체적 설립취지는 ①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시행되어 오던 교회내의 모든 자선 및 복지사업과 개발사업을 교구중심으로 하며, 교구가 직접, 간접으로 조화,조정시키고 격려, 권장시키는데 있다.

② 사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사회복지분야에서 의식개발을 위한 program을 통하여 모든 사업을 효율적으로 전개한다.

③ 지금까지 무질서했던 외원에 의한 사업을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업부터 우선 배정하고 외원신청도 일원화 하는데 있다.

④ 우리 형제를 우리가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모금운동과 교육문제를 조직적 체계적으로 벌인다.

⑤ 교회가 현재 벌이고 있는 사업, 또 필요한 사업에 대한 조사사업을 벌인다.

이러한 취지로 결성된 인성회는 그 첫 사업으로 1977년 1월27일 인성회 전국대표자회의를 열고 매년 "사순절운동"을 실시할 것을 결의, 동년 2월18일자로 주교단의 재가를 얻었다. 그래서 1977년 첫해 사순절 기간동안 모금운동의 결과는 총 16,838,744원이었다. 인성회는 모금액의 90%를 교구인성회가 쓰고 나머지 10%는 전국 인성회가 긴급구호기금으로 쓴다. 이 약정에 따라 첫해 모금액중 15,637,446원은 교구인성회가, 나머지 1,201,298원은 전국인성회 기금으로 헌납했다.

사순정모금은 교회가 부활절 이전 40일간 전통적으로 극기와 애긍을 강조하는 기간으로, 이 기간동안 극기와 단식제로 절약한 몫을 각본당단위로 헌금하고 또 전국적으로 사순절동안 특별히 하루를 인성회 기금을 위한 단식일로 정해 그 몫을 모금하는 것이다. 이 단식모금은 전세계 거의 모든 가톨릭 교회에서 실시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도 대만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실시되고 있다. 정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지리부인회의 지원사업도 이러한 단식모금운동으로 모여진 자금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첫해의 모금실적은 아직도 인성회에 관한 교육과 선전이 덜된 상태여서 근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해도 해가 거듭할 수록 점차 자리가 잡혀 1978년에는 19%가 증가한 2천여만원이 모금됐고 1979년에는 46%가 증가한 3천만원에 육박했으며 1980년에는 38%가 증가해 4천만원이 넘었다.

인성회가 설립되고 3년후인 1978년가지 교구인성회가 설립된데는 서울, 대전, 인천, 원주, 청주, 마산, 전주증 모두 7개교구로 반이 조직을 완료했고 나머지 6개교구가 책임자를 임명, 조직을 서둘러 1980년 현재로 전국 14개교구 전부가 인성회 조직을 완료했다.

그동안 전국인성회가 벌인 사업은 주로 전국적으로 대규모 재해에 대한 긴衁브구호였는데 그중에는 여러차례의 수해, 이리폭발사고, 장성탄광 화재사건, 홍성지진, 마산부림시장 화재사건 등 재난이 생길때 마다 구호금품을 수집, 지원한 일이 있다.

1977년 전국인성회 기금으로 들어온 1,201,298원중 서울,경기지방 수재민 의연금으로 700,000원, 장성탄광 의연금으로 500,000원을 지출했고 그외 1977년도에 따로 재해긴금구호금을 모금한 액수는 국내 8개 교구 및 단체와 해외 9개 단체에서 모두 15,862,138원을 모금하여 재해구호금으로 지출했다.

1978년에는 전국적인 긴급구호사태가 발생하지 않아 전국인성회의 긴급구호활동은 없었고홍성지진(대전) 동해안 해난사고(춘천) 마산부림시장화재(마산) 등에 대하여 각교구 인성회가 구호활동을 전개했다.

1979년에는 8월초 중부지방과 8월말 남부지방에 수해가 발생하여 모두 3천2백여만원의 지원을 했는데 그 내용은 마산이 피해가 가장 심해 12,933,982원을 지원했다.

1980년에는 광주사태로 긴급구호금 모은 것 52,058,880원과 긴급구호비 잔액 2,145,645원등 합계 54,204,525원을 광주교구에 지원했고, 그해 7월 중부지역수해때 청주교구에 16,130,010원, 대전교구에 15,001,000원, 안동교구에 29,454,000원 합계 60,585,010원을 지원했다. 또 같은 해 중부 이북지방에 우박, 냉해 등 농작물 피해에 대한 지원금 30,090,000원을 지급했다. 그래서 1980년도 총지원금액이 144,879,533으로 연간 긴금구호비만 1억원이 넘을 만큼 활발한 사업을 벌였다.

그외 외원조정업무, 홍보, 교육사업등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그중 인성회가 주축이 되어 벌인 사회사업의 조정 및 결연업무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① 가톨릭 아동복지협의회

1978년부터 아동복지사업 종사자들 약 15명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져오다가 1979년 세계 어린이 해를 계기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즉, 1979년 11월11일 전국에서 16명이 모여 각시설, 단체의 현황보고와 문제점을 토의한 후 12월1일에는 세미나를 열어 협의회 결성준비를 결의하고 1980년 9월에 대체적인 현황파악을 마친 후 동년 10월 40여개 시설에서 50여 회원이 참석하여 정식으로 발족, 교회내 아동복지에 관한 공동보조를 취하는데 헌신키로 결의하고 임시 사업국을 전국 인성회 사업국에 설치했다.

② 가톨릭 결핵사업협의회 조직

교회내 결핵사업에 종사하는 시설 및 기관이 1980년 2월 총회를 열고 새로 협회를 조직, 17개시설 기관에서 30여명의 회원으로 정식 출항했다. 이 협회는 임시사무국을 서울가톨릭복지회(인성회) 내에 두고 주로 조직적 결핵관리사업의 방법 및 협회 활성화를 위한 사업에 역점을 두며 상호 정보교환 및 시범사업을 지구별로 연구하고 있다.

③ 심신장애자사업종사자 모임

1981년 세계장애인의 해를 맞아 서울대교구 인성회가 주동이 되어 장애자사업 종사자 및 장애자단체 대표들이 모여 공동사업을 논의했다.

④ 교회 여성 사회사업종사자 모임

교회 사회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여성 사회사업 종사자들이 친목과 상호 의견교환을 위해 1980년 3월 모임을 갖고 정기적인 회합을 갖기로 했다.

⑤ 국내정착 월남난민문제에 대한 모임

월남이 공산화된 후 국내에 정착한 500여명의 월남 난민들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개신교측 월남난민 주관처와 정보교류를 시작하여 서울가톨릭사회복뮽뢰, 착한목자의 수녀회, 프란치스코회의 파신부, 미대사관등과 협의 모임을 갖고 있다.

이상에서 대개 살펴본대로 교회사회사업의 새로운 주요재정으로서의 모금운동을 벌임과 동시에 지금가지 개별적이고 산발적인 교회사회사업을 협의 조정함으로써 濫救 또는 漏救의 폐단을 방지할 수 있고, 사회복지 및 연구활동의 강화는 교회사회사업의 진로 및 사회문제에 대한 치료적 차원에서 나아가 예방적인 사업에까지 분야를 넓힐 수 있어 인성회가 바로 오늘날 교회사회사업에서 가장관심을 가지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사업이라 할 수 있다. 또 사실상 지금까지의 발전 추세로 보아 충분히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