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지행정학회,「복지행정논총」제8집(1998),pp.203-221.

오스트리아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성립배경 및 그 효과
The Establishment & Effect of the Social Partnership in Austria

I. 서 론

오스트리아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우리 나라와 유사한 점이 많다. 독일과의 합방상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았고 독일과 함께 연합국의 점령상태를 경험하였다. 지리적으로도 동서 양 진영의 경계선상에 위치하여 이대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장이 되었다. 패전국가로서 산업은 마비되었고 전후 이 나라의 경제 수준은 유럽에서 최하위에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나 오늘날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라가 넘는 풍요로운 복지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라고 하는 독특한 사회제도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은 서구사회에서는 하나의 상식이 되어있다.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조직과 운영상의 특징은 필자의 논문 "오스트리아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조직 및 운영"에서 이미 밝혔다. 따라서 본 논문은 앞의 논문에 연계되는 후속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동반협력제도가 오스트리아 사회를 안정과 번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이해당사들이 전국망으로 잘 조직화 되었고 조직의 최고 의결기구인 공동위원회의 전원합의제라고 하는 독특한 운영방법, 그리고 무엇 보다도 자본과 노동이 서로를 인정하는 공동체적 자세가 그 바탕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특징들로 대표되는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어떤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성립되었으며 또 이 제도가 가져다 준 효과는 무엇인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 제도가 우리의 model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 보고 우리의 model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오스트리아가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안정과 성장의 대립되는 듯한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고 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II.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성립배경

1) 역사적 배경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오스트리아의 독특한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식 모델'이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를 든다. 이러한 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 20세기초로 돌아가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과 제1공화국의 성립 등 일련의 사태들이 숨가쁘게 돌아가던 당시 다수당끼리의 긴장과 분열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중부 유럽을 거의 통합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1866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종말을 고하기 시작했다. 1867년 마쟈르 민족주의(magyarishen nationalismus)에 항복하여 헝가리와 협상을 맺은 것을 비롯하여 잇따른 왕가의 비극 즉, 1867년 당시 오스트리아의 황제였던 Franz Joseph I세의 형이자 멕시코 황제인 Ferdinand Maximilian이 총살당하고, 1889년 Joseph의 외아들인 왕세자 Thronerbe Rudolf의 자살, 1898년에는 왕비 Gernablin Ferdinand가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 당하는 것 등 일련의 사태는 제국의 종말을 예고하는 사건들이었다. 마침내 1914년 6월 28일 조카 Franz Ferdinand가 사라예보(Sarajewo)에서 암살 당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을 초래했고 이 전쟁에서 패전함으로써 대제국은 와해되어 1918년 당시 황제 Kaiser Karl I 가 "모든 국정에의 참여를 포기"("auf jedem Anteil an den Staatsgeschäften") 한다는 칙서(manifesto)를 발표함으로써 왕정국가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오스트리아 사회는 국가적 좌절, 사회적 부조리, 경제적 불황, 정치적 부패가 만연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 오스트리아는 거대한 복합제국(multi-national empire)에서 하나의 조그마한 독일어권 국가로 전락했고, 다민족국가에서 단일인종 국가로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나라가 떠 앉게 된 경제적 혼란과 전후의 비참한 상황은 어떤 형태로든 국가적 합일을 위한 사회적 안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은 마침내 신생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주역을 담당한 이익집단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 결과 국가의 사회정책에 대폭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 당시의 사화정책은 아직도 초보단계로 현대적 의미의 사회보장 수준은 아니었지만 노동법(labour legislation), 사회법(social legislation)에 상당한 발전을 가져온 것만은 틀림없다. 일례로 1919년에 1일 8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고, 노동위원회(Betribstrat)법안이 통과되었다. 1920년에는 국가공무원 의료보험법(Health Insurance Act)과 산재보험법(Industrial Accident Insurance Act)이 통과되었고, 1927년에는 실업보험(unemployment insurance)이 도입되었고, 마침내 1935년 사회보험법이 완결되었다.

경제, 사회, 정치적 대립도 이 시기에 점차 심각한 양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정치성향은 1922년부터 수상이 된 Ignaz Seipel이 이끄는 기독교 사회당(Christlich -Soziale Regierung)과 반대당으로 1920년부터 Otto Bauer가 주도하는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en)을 거의 비슷하게 지지하는 양분화 된 양상을 보였다. 국민의 지지가 양분된 가운데 기독교 사회당과 사회민주당은 연정을 수립했으나 이 초기의 연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후 경제사정이 더욱 악화되자 국민적 합일의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져 갔다. 그리고 오랜 정치적, 계급적 대립은 흔히 자기들 주장을 나타내는데 있어서도 과격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사회적으로는 실업이 만연했는데 이것은 국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실업으로 인한 무력감 또는 실업에 대한 공포는 국민들로 하여금 물질적, 심리적으로 압박을 느끼게 하여 극단주의 내지는 정치적 고립으로 몰고 갔고 이로 인해 사회적 혼란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때, 독일에서는 Adolf Hitler가 정권을 장악하고 1938년 5월 12일 오스트리아를 침공, 5월 13일 드디어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그 후 1년 반이 지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망으로 끝났고 세계는 자유て공산 양 진영으로 분할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동서 양 진영의 경계선상에 놓여 있었으나 중립국가를 표방함으로써 오늘날의 국가모습으로 독립된 나라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제1차 세계대전후의 상황과 같은 경제불황과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는 정치인들의 지혜와 단합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함께 따라 들어 온 4대 점령 세력을 중립국가 표방함으로써 잘 막아내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생산성은 매우 낮아 1인당 총 생산은 EEC국가의 평균수준보다 약 25%나 낮았다. 서유럽의 변방국가로서, 밀려오는 유럽 공동시장으로부터 고립될 위기에 직면한 이 나라는 도저히 이러한 여건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소생할 것 같지 않았다.

1945년 이후 오스트리아 정계는 이와 같은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열된 사회를 원래대로 건설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것은 적어도 19세기말로는 되돌아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민적 합일(consensus)을 바탕으로 오스트리아 정치는 사회당과 국민당의 양대 정당이 교대로, 때로는 양대 정당이 연정을 수립하여 집권해 오면서 오스트리아는 살아남았고 정치적て사회적으로 안정을 회복하였고 경제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정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정부와 기업과 노동조합간에 성립된 경제적 및 사회적 동반협력제도(economic and social partnership)라 할 수 있다.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연정의 소산이었는데, 경제정책을 수립함에 있어 총체적으로 절충을 이룩하고 그 기본 틀을 확대시켜 나가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것은 1947년부터 1951년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임금-물가협약(wage-price agreement)을 통해 그 바탕이 이루어 졌다.

2) 정치적 배경

오스트리아의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역사적 성립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몰락하고 제1공화국이 수립되던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있었던 다수당끼리의 긴장과 분열 상황을 특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 오스트리아가 떠 안게 된 경제적 혼란과 전후의 비참한 상황은 어떤 형태로든 국가적 합일을 위한 사회적 안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은 마침내 신생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주역을 담당한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따라서 초기의 사회적 동반협력제도가 출현하게 된 배경은 종교, 정치 이데올로기, 실용주의 등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국가로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현실적인 시도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전쟁 후유증, 산업계의 혼란, 자원과 식료품의 부족,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위협 등으로 인해 마치 사면초가와 같은 허약한 국가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방되었던 1938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사이에, 히틀러의 압제에 몸을 도사린 사회주의자들은 1925년이래 그들 운동의 특성이었던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점차 포기해 갔고, 한편 보수주의자들도 그들의 독재성향을 버렸다. 마침내 1934년, 민주제도가 철폐되면서 전통적인 두개의 대 정치집단(정당)은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즉, 앞에서 말한 대로 사회주의정당은 불법화되고 기독교 사회당에 흡수됨으로서 자발적인 협력과 조직적인 자기결정이라고 하는 민주적 바탕으로, 오늘날 재정립된 돌푸스의 새로운 제도에 의한 '강력한 연합'아래 단일정당국가를 이루었다.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첫 번째 형태는 이와 같은 돌푸스의 '조합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의 연정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또 제1차 세계대전 후 경제사정이 더욱 악화되자 국민적 대립은 흔히 자기들 주장을 나타내는데 있어서도 과격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1945년 이후 오스트리아 정당제도는 분열된 사회를 원래대로 건설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것은 적어도 19세기말로는 되돌아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5년 11월 처음으로 개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수적 기독교 민주당인 국민당(ÖVP)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론에 순응하여 국민당은 사회당(SPÖ)과 함께 연립정부를 수립하였다.

초창기 주요 과업은 식량공급을 확보하고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4강 분할점령의 청산에 의해 오스트리아 독립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외형적으로 서로 모순된 사회와 계급세력 간에 이루어진 재 제휴는 1945년 이후 국가재건에 관한 다양한 제도를 하나로 만들고 독립을 위해 싸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문제점들에 접근하는데 있어서도 합의에 의해서 해결점을 찾았다. 이러한 정치형세가 현대적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기초를 형성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정치권력의 지배자들(사회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과 '경제적 동반자들(사용자 조직과 노동자 조직) 사이에 당시의 위급한 정치적 사정을 타협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조합주의적 실용주의를 가져오게 했다.

거대한 다민족제국(multi-national empire)이 1918년 하나의 조그마한 독일어권 국가로 전락한 이래, 오스트리아는 높은 인종적 동일성이 하나의 특징이 되었다. 그래서 1945년 민주정부를 수립할 때도 정치적으로 이해관계가 두드러진 집단은 세 부류뿐이었다. 그 첫째 부류가 산업노동자들이고 다른 부류는 농민과 기업인들이었다. 첫째 집단은 오스트리아 사회당(SPÖ)이 대변하였고 나머지는 오스트리아 기독교국민당(ÖVP)과 오스트리아 자유당(FPÖ)이 대변하였다.

단일화, 중앙집권화, 전국적 조직이라는 원칙 하에 오스트리아 노동조합총연맹(ÖGB)이 다시 설립되었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노조연맹이 노동회의소와 함께 1947-51년 사이 임금-물가협약(wage-price agreements)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후에 오늘날의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로 발전한 이 제도로 인해 산업경제학의 매개변수(industrial-economic parameters)를 바꾸어 놓았다. 정부와 행정을 통한 정치적 조정은 사회적 경제적 조합주의(사회적 동반협력제도)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경제적 이익단체들은 이 제도를 통해 경제정책, 사회복지정책 그리고 노사관계 등의 분야에서 정책수립의 한 몫을 차지하였다.

각 정당들 (국민당, 사회당, 자유당)은 세 개의 위원회와 오스트리아 노동조합 총연맹 안에 자기들의 지지자들(fractions)이나 지지집단을 가지고 있어 이들을 통해 위원회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영향력은 다른 위원회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예컨대, 사회당은 노동조합 총연맹과 노동회의소를 지배하고 있고 국민당은 농업회의소와 상공회의소를 장악하고 있다. 농업회의소는 자유당도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와 같이 주요 정당들과 사회적 세력집단 간에는 깊이 연결되어 있다.

국민당은 기독교 노동자 연맹, 사용자 단체, 농민연합 등으로 구성되었다. 사회당은 노동자 총연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사실, 전통적으로 노동조합 총연맹의 지도자가 사회부 장관의 자격으로 노동조합 전국 총회의 의장이 되었다. 국민당은 경제적인 면에서 개인의 자유와 민간주도를 강조했다. 경제인연맹 회장으로 1952년에 국민당 당수가 된 Julius Raab은 서독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제도를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국민당이 사회당과의 연정에 실패한 후 새로 실시한 선거에서 승리, 다수당이 됨으로써 1966년 4월 국민당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국민당은 1970년까지 집권했다. 1945년부터 1970년까지 국민당이 공화국 수상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Raab 같은 이는 Johann Böhm 같은 노동조합 의장과 좋은 협력관계를 이루었고, 결국 이들은 공동으로 오스트리아의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를 이루어낸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제도가 서구 민주국가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초상식적 사례'로 여겨지고 있는 것도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를 통한 고도의 정치적 안정성 때문이다.

3) 종교적 배경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핵심은 동등위원회(parity committee)이다. 그것은 각 이익집단들이 다 같은 조건으로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6-27절의 모든 사람은 다 같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에 입각한 그리스도교적 평등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산업혁명 후 빈부의 격차로 인한 노사갈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되자 무신론적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확산되어 갔다. 이로 인한 유럽 사회의 안정이 위태롭게 되고,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더 이상 도외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Rerum novarum'을 발표,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사회주의를 배격함과 동시에 노동자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음을 선언했다.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동반자들의 '전원 합의제'(Konkordanz- mechanismus) 즉,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타협을 통해 공동의 관심사를 찾아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이다. 이 '합의모델'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자본과 노동의 비중을 동일시하는 이념이며, 이 동등성의 원리(Prinzip der parität)는 보충성의 원리(Subsidiaritätsprinzip) 및 연대성의 원리(Solidaritätsprinzip)와 더불어 현실 사회의 모든 질서체계뿐 아니라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체계를 유지시키는 기반이 되고 있다. 교황 레오 13세가 그의 회칙 '레룸 노바룸'에서 이와 같은 원리를 제시했다. 즉, "자본 없는 노동도, 노동 없는 자본도 있을 수 없다"고. 이러한 원리들은 결국 노사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상대방의 존재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19세기 말엽 오스트리아에서는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각종 이익집단들은 1891년에 반포된 교황회칙 레룸 노바룸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레룸 노바룸은 노동자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고 인간다운 노동조건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 결국 노동계급을 유산계급화 함으로써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서구 기독교사회를 지탱해 왔다. 이런 시점에서, 무신론적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당의 주장도 민주적인 방법으로 노동자 계급의 세력을 규합하여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도모한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두개의 가장 큰 정당인 기독교 사회당과 사회민주당의 입장이 서로 커다란 상이점에도 불구하고 외견상으로는 그다지 상극인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 이것은 결국 자유, 화합, 관용을 주장한다. 그래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수적 반자본주의라는 입장을 취한다. 크리스천적인 평등의 원리는 신분상의 평등뿐만 아니라 부의 평등한 분배까지도 요구한다. 신분상의 평등사상이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에서 노사가 동반자로서 한 자리에 앉을 수 있게 했다면, 동시에 재산상의 평등사상이 전원합의에 의한 타협을 가능하게 했다.

1891년 Rerum novarum 반포이래, 가톨릭 교회의 사회교의는 1941년 Quadragesimo anno 에서 다시 한번 부의 평등 분배를 강조하고 그 후 매 10년마다 이어지는 사회교의에 관한 교황 회칙은 국내적인 부의 분배에서 점차 세계적인 부의 재분배에로 발전하고 있다. 1967년에 나온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에서는 처음으로 부의 국제적인 분배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 회칙은 "국가들 사이에 게재하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불균형이 지나치면 긴장과 불화가 생기며 드디어 평화를 위기에 몰아넣는다" 경고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제3세계에 대한 경제적 원조를 계속해 왔고 특히 1990년대에 와서는 이웃 나라 유고가 내전에 휘말려 나라가 분열되고 전쟁난민들이 쏟아져 나올 때 그 어느 나라 보다 난민들을 많이 받아 들였고 또 물질적 도움을 많이 베풀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칭송을 받은 것은 아직도 오스트리아가 크리스천 정신대로 살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국민의 85% 이상이 가톨릭인 이 나라는 가톨릭 교회의 정신과 교황의 가르침이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자본가て노동자て정부가 서로 대칭 되는 이해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를 성공적으로 유지해 온 것은 이러한 종교적 배경이 큰 작용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III.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효과 및 문제점

1.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정치적 효과

오스트리아식 모델은 효과적인 국민성과 중립성, 정치적 합의,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3 가지 기둥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을 통해 가능할 수 있었다. 경제적 혼란과 제2차 세계대전의 비참한 결과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생존을 위해서는 1945년 이후 독립을 위한 안정된 상황의 확보가 요구되었다. 사회적 분열은 피해야 한다는 여론이 광범위하게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국민적 여론에 따라 ÖVP는 1945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SPÖ와 함께 연정을 수립했다.

이 때부터 오늘날까지 두 다수정당은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정 또는 단일정당정부를 구성해 왔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오스트리아의 이러한 정치적 안정은, 종종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사이에서 '초상식적'(deviant) 사례로 간주되었다.

우리가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와 같은 연정의 소산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적 안정은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결과이다.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에 참여하는 주요 정당들과 사회세력들 간에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법정제도가 아니라 임의기구이다. 따라서 공식적인 권한이 없다. 그러나 그 효과는 법정기구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 참여하는 정부는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를 통한 이익당사자들의 합의로 이루어진 결정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행정부 내에서의 정치적 수용은 사회적 경제적 조합주의 체계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에 의해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회적 동반협력제도 안에서 경제적 이익집단들은 경제분야, 복지정책, 노사관계 등에 관한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한다. 그러면서 정치, 특히 정당체계는 사회적 불안이란 거의 완전히 사라진 투표성향을 보임으로써 고도의 안정과 대중의 지지를 누려왔다.

<표 1> 전후 오스트리아 정부의 정당구성

 

1945

1946

1947

 

 

1955

 

1966

 

1970

 

 

1971

 

 

1983

 

1986

 

1992

 ÖVP/SPÖ/KPÖ

임  시  정  부

점     령

국  민  정  부

ÖVP/SPÖ

대    연    정

독     립

ÖVP

단일 정당 정부

SPÖ

소  수  정  부

SPÖ

단일 정당 정부

(크라이스키 시기)

SPÖ/FPÖ

소    연    정

SPÖ/ÖVP

대    연    정

자료 : Melanie A. Sully, A Contemporary of Austria (London : Rortledge, 1990), p.5.

그러나 1990년대 초에 와서 보수주의로의 회귀가 전세계적인 추세가 됨에 따라 두 주요 정당들의 대중 지지율은 급격히 떨어지고 다음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타정당으로 분류되던 극우의 FPÖ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오스트리아 미래의 정치적 안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표 2>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정당 지지도 추세

 

SPÖ+ÖVP

기타정당

투표율

기권

무효

1945

1949

1956

1959

1962

1966

1970

1971

1975

1979

1983

1986

1990

94.4

82.7

83.9

82.7

82.9

84.3

84.7

85.2

85.9

84.7

83.0

75.0

62.6

5.4

16.8

12.1

11.5

10.9

9.5

7.1

7.2

7.0

7.5

9.6

15.5

23.6

--

--

96.0

94.2

93.8

93.8

91.8

92.4

92.9

92.2

92.6

90.5

86.1

--

--

4.1

5.8

6.2

6.2

8.2

7.6

7.1

7.8

7.4

9.5

13.9

--

--

5.8

3.0

1.7

4.8

6.9

2.0

0.5

1.3

4.6

6.1

9.9

    자료 : Kurt Richard Luther and Wolfgang C. Müller, West European Politics (London : Frank Cass, 1992 Jan.), p.29.; data of 1945 and 1949 quoted from Melanie A. Sully, A Contemporary History of Austria (London : Routledge, 1990), p.4.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전후 국가 재건에 있어서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뿐 아니라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을 다른 선진국들보다도 더욱 안정되게 유지한 1970년대 오스트리아식 케인즈 정책(Austrian -Keynesian policies)의 주역을 담당했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안정을 계속 지켜줄 것으로 본다.

2.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경제적 효과

한 체제의 경제적 효과를 평가하기 위해서, 그 체제의 결과로서의 경제성장, 인플레이션, 산업에서의 평화기능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1945년이래 오스트리아 경제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후 재건이라든가 현대화와 197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맞은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 등이 바로 이러한 성공의 예가 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 경제정책은 전후 재건에 있어서나 1970년대 경제위기 때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심각한 실업과 경제침체를 면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사회복지 면에서 1960년대에 OECD 국가 중 1위였을 뿐 아니라, 경제성장 (70년대 2위), 완전고용(60-70년대 동안 2위), 물가안정(이 기간동안 3위)등 어느 부분에서나 사회경제적으로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사실, 이러한 성취는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를 통한 혼합경제, 소득정책 그리고 협력적 연방주의 등으로 이룩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1) 경제성장

오스트리아가 다른 유럽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1990년을 전후한 10년 동안 사회복지비로 더 많은 지출을 하고서도 경제위기를 맞지 않은 것은 사회제도적으로 이를 잘 보완 해 왔기 때문이다. 1969년이래 오스트리아의 실질 성장은 1973, 1984, 1986, 1987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OECD 국가들의 평균수준 보다 높았다. 때로는 1979년의 경우와 같이 (OECD 3.3%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4.7%) 대단히 높은 성장을 보이기도 했다.

1969-73년 사이에 OECD 국가들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4.7%인데 비해 오스트리아는 5.7%를 나타냈다. 1973-79년 동안에는 3% (OECD는 2.4%) 성장했고 1979-85년 간에는 OECD 2.6% 성장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1.9% 성장에 그쳤다. 1969-85년의 전체 기간 동안을 보면 OECD 전체가 2.5%의 성장을 한 반면 오스트리아는 연평균 3.2%의 성장을 했다.

<표 3> OECD 국가의 실질 GDP/GNP 성장

Korea

Austria

그 전해와 비교한 백분율 변화

평균

1980-88

1989

1990

1991

1992

9.7

1.7

6.8

4.0

9.3

4.6

8.4

2.9

4.7

3.0

OECD europe

Total OECD

2.1

2.8

3.3

3.3

2.8

2.6

1.4

1.1

2.4

2.9

Canada

United states

Japan

Belgium

France

Germany

Netherland

United Kingdom

Italy

Portugal

Spain

Finland

Norway

Sweden

Australia

New Zealand

3.2

2.9

4.0

1.5

2.1

1.6

1.3

2.8

2.2

2.2

2.6

3.3

2.8

2.1

3.3

2.3

3.0

2.5

4.7

4.0

3.9

3.8

4.0

1.9

3.0

5.4

4.8

5.2

0.4

2.2

4.6

0.2

0.9

0.9

5.6

3.5

2.8

4.5

3.5

0.6

2.0

4.4

3.7

0

1.8

0.3

1.5

1.2

-1.0

-0.2

3.5

1.9

1.4

2.8

2.1

-1.8

1.7

3.4

2.9

-2.4

2.6

-0.9

0.2

-0.4

3.1

3.1

3.5

2.3

2.7

2.2

2.3

1.6

2.7

3.4

3.3

0.9

3.1

0.4

1.8

1.0

     자료 : OECD, Economic Outline, No.49, June 1991. requoted from OECD, Employment Outline, July 1991, p.4.               한국은 한국은행 제공 자료의 '82-88년도 평균치

1980-88년 동안 오스트리아는 OECD의 2.1% 성장에 비해 1.7%의 성장에 그쳤고, 1987년에는 1.8%의 성장 (OECD 2.5%)을 보였다. 그러나 1989년부터는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4.0% (OECD 3.3%), 90년 4.6% (OECD 2.8%), 91년 2.9% (OECD 1.4%), 92년 3.0% (OECD 2.4%)의 성장을 나타냈다.

실질 국민소득은 1980년과 1984년만 마이너스 성장을 했을 뿐 1986(+3.3%)과 1987년에는 높은 성장을 보였다. 1980년대 후반기의 1인당 총생산은 190,000 오스트리아 쉴링(27,000달러)이나 되었고 1969년이래, 1984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다.

2) 물가안정

오스트리아는 1969년이래, 실은 그 보다 더 일찍부터, 인플레이션의 저 수준을 철저히 지켜 왔다.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인플레이션은 OECD 국가들의 평균치 보다 언제나 낮았으며 대부분의 주요 교역 상대국들보다도 낮았다. 오스트리아는 1982년 6.8%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한 적이 있다. 그러나 같은 기간의 OECD국가들 평균 인플레이션률은 14.3%였다. 그후 1985년 3.2%, 1986년 1.7% 수준으로 떨어졌다. 1980년이래 전기간을 통해 OECD 국가들 중 다만 독일과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 보다 오스트리아는 낮은 인플레이션률을 유지해 왔다.

3) 실업률

오스트리아의 실업률은 적정수준을 유지해 왔다. 1976년 오스트리아의 실업률은 2.0% 였고, 1981년 이후 지금까지 2.4% 선을 유지하고 있다. 1986년 한때 5.2%까지 올라 간 적이 있다. 이때 OECD 국가들은 10.6% 였다. 오스트리아는 이때 4위를 기록했다. 독일은 8.9%라는 실업률을 보였다. 스위스를 비롯한 노르웨이, 스웨덴만이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 보다 낮은 실업률을 유지했는데 이 두 나라는 역시 사회민주주의정책을 수행하는 나라들이다. 1987년 전반기를 정점으로 그후 1987년 후반과 1988년 전반기에 다시 실업률은 떨어지기 시작하여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독일을 비롯한 OECD 국가들의 평균 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서유럽 여러 나라들이 석유파동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도 오스트리아는 평균 실업률 1.95%(1975-81)를 유지했다. 그후 한 때는 실업률이 5.6%(1987)로 증가하긴 했지만 이때도 다른 서방 국가들보다는 낮은 수준을 나타내었을 뿐 아니라 최근 다시 실업률이 낮아지고 있다.

<표 4> OECD 국가의 실업률

Korea

Austria

1980-88

1989

1990

1991

1992

노동력 중의 백분율

-

3.1

2.6

3.2

2.4

3.3

2.3

3.5

2.4

3.8

OECD europe

Total OECD

9.1

7.5

8.5

6.4

8.0

6.2

8.7

7.1

9.0

7.1

Canada

United states

Japan

Belgium

France

Germany

Netherland

United Kingdom

Italy

Portugal

Spain

Finland

Norway

Sweden

Australia

New Zealand

9.5

7.5

2.5

11.3

9.0

5.6

8.6

10.0

10.1

7.7

18.1

5.1

2.5

2.2

7.7

4.1

7.5

5.3

2.3

9.3

9.4

5.6

7.4

6.2

12.1

5.0

17.3

3.5

4.9

1.4

6.1

7.1

8.1

5.5

2.1

8.8

9.0

5.1

6.6

5.5

11.0

4.6

16.2

3.4

5.2

1.5

6.9

7.8

10.1

6.7

2.2

8.8

9.4

5.0

6.5

8.2

11.3

4.5

15.9

5.9

5.1

2.8

9.9

9.3

10.1

6.3

2.3

8.9

9.7

5.1

6.4

9.6

11.2

4.6

15.6

6.9

4.5

3.6

9.9

10.0

    자료 : OECD, Employment outlook, July 1991, p.7.

4) 산업평화

오스트리아에서는 노동쟁의나 데모 또는 파업을 구경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의 산업현장은 극도로 평온하다. 오스트리아의 노동자 1인당 파업시간이 1980년 2.9분, 1983년과 1984년 0.1분, 1985년 3.9분이라고 하는 대단한 수준의 사회적 안정을 이룩했다. 다만, 독일만이 1980년 2.7분, 1983년 0.9분, 1984년 125.1분, 1985년 0.8분으로 비슷한 기록을 나타냈다. 영국의 경우는 1980년 249.9분, 1986년 85.6분, 1984년 613.2분, 1985년 143.1분이나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노동자 1인당 '파업시간' 평균치를 보면 1980년에 3.9분, 1983년과 1984년에는 거의 0분이며 1985년에는 4분밖에 안된다. <표 5>에서와 같이 사실상 오스트리아에서 파업은 매우 드문 일이며 오스트리아 노사관계에 있어서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무파업이 오스트리아 경제를 성공적으로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전 세계가 불황에 빠졌을 때에도 오스트리아는 성장을 지속했다. 이러한 성공을 이룩한 바탕에는 사회적 동반협력제도가 핵심적 요소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음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표 5> OECD 국가의 파업과 공장폐쇄 수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Korea

Austria

Canada

USA

Japan

Belgium

France

Germany

Netherland

UK

Italy

Portugal

Spain

Finland

Norway

Sweden

Australia

New Zealand

88

2

677

96

944

--

3113

--

12

1528

1747

--

1810

1212

12

46

2060

333

98

4

645

81

893

--

2837

--

9

1352

1565

--

1451

1919

9

92

1787

333

114

2

717

62

596

--

2537

--

16

1206

1816

--

1498

1079

21

206

1965

364

265

4

829

54

627

65

1901

--

45

903

1341

--

1092

833

11

160

1895

383

276

11

735

69

620

--

1391

--

35

1074

1469

--

999

1236

16

75

1754

215

3617

6

668

46

474

--

1391

--

28

1016

1149

--

1576

791

10

72

1517

193

1873

--

548

40

498

64

1852

--

38

781

1769

--

1279

1327

15

144

1508

172

1616

7

627

51

362

81

1943

--

27

701

1297

894

1094

606

14

139

1402

171

322

9

579

44

284

33

1529

--

29

630

1094

250

1312

450

155

126

1193

137

234

9

460

40

--

--

1318

--

31

369

--

305

1645

270

4

23

1058

71

    자료 : ILO Year Book of Labour Statistics, 1992 (ILO : Geneva, 1992).

3.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문제점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문제점이라고 하면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존속 자체에 대한 문제점과 또 하나는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로부터 파생되는 문제점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먼저 사회적 동반협력제도가 계속적으로 존속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점으로는 최근 국민들의 각 정당에 대한 지지성향의 변화로 보아 우려를 나타내는 견해가 있다. 앞에서 보아 온 것처럼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사회당과 국민당의 연정에 의한 소산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국민들이 이 양대 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점차 약해지고 극우성향을 가진 자유당(FPÖ)의 의회진출이 늘어나고 있음을 들어 하는 말이다.

오스트리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정과 평화와 번영의 낙원처럼 주목을 받아 왔다. 여타 유럽국가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많은 사회복지비용으로 인해 경제적 위기를 극복해야 할 어떠한 시도도 필요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사회체제가 안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동반협력제도가 가능했고 또 효과적일 수 있었던 것은 각 이익집단들이 대의제의 조직체계를 고도로 중앙 집중화했고 광범한 국영기업과 또 그것이 갖는 조정자로서의 견인력, 정당과 사회적 동반자 조직간의 밀접한 상호 침투, 정책적 의사결정과정에서의 여론수렴방식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연립정부는 시대적 요구에 의해 수립되었음을 볼 수 있다. 즉 사회보장과 생계보장을 수립해야 했을 때, 그리고 국가가 독립을 획득해야 했을 때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특히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연립정부에 의해 그 토대가 안정되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는 최저생활의 보장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번영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의 사회당과 국민당에 대한 지지도가 점차 약해지고 극우성향을 지닌 자유당의 의회진출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연정 자체가 존립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이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자유당이나 녹색당에 대한 선호는 자유주의로의 세계적인 추세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빈부의 전형인 노동과 자본의 평등의 원칙아래 잘 가능해 왔다. 그러나 정당선호에 대한 국민들의 변화로 볼 때, 국민들은 사회적 동반협력제도가 산출하는 분배의 수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의 균형에서 후자에 불리하게 기울어진다고 본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소위 말하는 서구 복지국가에서 널리 퍼져 있다.

Gorbatschow는 공산주의의 몰락의 시기에 있어서 러시아의 새로운 모델은 스웨덴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산주의 몰락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동유럽이 노동생산성의 하락으로 인한 국제경쟁력이 상실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전문가들은 서구 복지국가도 동일한 이유로 몰락할 수 있다고 예언했다.

미래에 대한 이러한 불안은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는 걱정이 없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에서 노동생산성은 여타 유럽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수지균형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위기의 조류를 극복할 강력한 자원을 갖고 있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새로운 사회환경에 잘 적응하고 변화했으며, 그러한 국민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오던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이 더욱 약화되고 신자들의 종교의식 참여 율이 떨어지고 있음을 들어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사상적 바탕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물론 이러한 우려가 가까운 시일 안에 현실로 나타나지는 않을지몰라도 전혀 근거 없는 우려는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가톨릭 교회의 적극적인 대응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점으로는 노사가 한 자리에 앉아 임금 및 물가를 조정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고임금 고물가의 결과를 초래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귀결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고임금 고물가의 결과는 국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경제의 국제 경쟁력에서는 불이익을 초래하게 된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오스트리아 경제가 유럽의 다른 국가들 보다 빠른 성장을 해 왔지만 앞으로는 유럽이 통합되고 동구가 개방됨으로써 야기되는 사회변동을 지금까지의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에 의해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동구에서는 계속해서 유입되는 이동인구가 있을 것이고 이들로 인한 실업문제와 고물가 정책으로 인한 국제 경쟁력의 상실은 경제의 지속적이고 빠른 성장을 둔화시킬 우려가 있다. 그 결과는 극우세력의 명분을 살려 줄 것이다.

이것은 10여년 전인 1981년 Paris에서 열렸던 [위기에 처한 복지국가] 문제를 다루기 위한 OECD국가들의 회의에서 당시 오스트리아 수상이던 크라이스키가 "오스트리아 경제가 경제성장과 실업률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떠한 위기도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로 극복할 수 있다"고 큰소리 쳤던 바로, 그 위기상황이 오늘에 와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라고 하는 사회제도로서가 아닌 오스트리아인들의 정신て문화적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V. 결 론

오스트리아는 역사적으로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사회적 이익당사자들이나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집단들 간에 언제나 국내적으로 단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지키고 유지하는데 힘써 왔다. 각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국민당과 사회당이라고 하는 양대정당이 다른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다수당 끼리의 연정이라는 방법으로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도 이익당사자들을 잘 대변할 수 있었으므로 사회적 안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장과 안정의 바탕이 되었던 것은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였고 이러한 제도가 성립가능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배경 때문이었다.

첫째,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자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되었고 하나의 작은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비록 독일로부터 독립은 했으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열된 사회를 안정된 통합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이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당시 양대정당이었던 국민당과 사회당은 교대로 집권하거나 다수당 끼리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형태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오늘의 오스트리아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둘째, 사회적 경제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사용자 단체와 노동자 단체가 한 자리에 앉아 임금`물가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이룩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익당사자 간의 사회적 동반협력제도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데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상 Raab과 노동조합 의장 Johann Böhm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셋째,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핵심은 공동위원회(parity committee)인데, 이 위원회는 전원합의제(Konkordanz-mechanismus)로 의사결정을 한다. 이 합의모델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자본과 노동의 비중을 동일시 하는 이념이며, 이 동등성의 원리(Prinzip der parität)는 보충성의 원리(Subsidiaritätsprinzip) 및 연대성의 원리(Solidaritätsprinzip)와 더불어 현실 사회의 모든 질서체계뿐 아니라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체계를 유지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교황 레오 13세가 그의 회칙 '레룸 노바룸'에서 이와 같은 원리를 제시했다. 즉, "자본 없는 노동없고, 노동 없는 자본도 있을 수 없다"고. 이러한 원리들은 결국 노사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상대방의 존재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국민의 85% 이상이 가톨릭인 이 나라는 가톨릭 교회의 정신과 교황의 가르침이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자본가て노동자て정부가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를 성공적으로 유지해 온 것은 이러한 종교적 배경이 큰 작용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스트리아식 모델은 효과적인 국민성과 중립성, 정치적 합의,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3 가지 기둥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을 통해 가능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성립된 사회적 동반협력제도가 오스트리아에 가져다 준 정치적 て 사회적 て 경제적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적 경제적 이익집단들이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를 통해 경제분야, 복지정책, 노사관계 등에 관한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자기들의 의견을 충분히 제시할 수 있으므로 사회적 て 정치적으로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둘째,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임금 て 물가협약을 통해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다. 실업률은 언제나 적정수준을 유지했고, 노동쟁의나 데모 또는 파업을 오스트리아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무파업이 오스트리아 경제를 성공적으로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상과 같이 살펴 볼 때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위기극복 자세는 우리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우리는 외침이 있었을 때 마다 국론이 분열되고 개인과 집단의 이해에 따라 외세에 영합해 왔다. 우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외세가 밀어닥쳤던 조선조에 친청파, 친로파, 친일파 등으로 갈라져 치열한 정쟁을 벌였고 마침내 친일파의 득세로 나라를 온통 일본에 팔아먹었다. 해방 후에는 친미파와 친쏘파로 갈라져 싸우면서 마침내 나라는 남북으로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러한 분파싸움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50년 만에 평화적으로 여야간의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IMF상황이라는 경제적 위기를 맞았고 이로 인해 대량실업이라는 사회적 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적 결단을 내리기 보다 개인과 당파의 이익만 추구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하에서 오스트리아는 동서냉전상황을 극복하고 하나의 자유통일국가를 이루었고 사회적 안정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남북분단과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또다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오스트리아의 성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사회적 동반협력제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매력적인 제도로 평가된다고 하겠다.

REFERENCES

박석돈(1997), 오스트리아 사회적 동반협력제도의 조직 및 운영" 福祉行政論叢 第7輯, 한국복지행정학회.
바오로 6세(1967),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
Alfred Dallinger(1988), "Social Security in Austria", Sweeney Jim and Weidenholzer Josef,
Austria : A Study in Modern Achivement, Avebury, England : Gower Pub..
Bundeskamzleramt(1998),Österreich Dokumentationen-Österreich Fin de Siecle-Erste Republik 1880-1938
,      Wien : Bundespressedienst, Cooper R.Martha(1982), The Search for Consensus, Paris : OECD.
Fitzmaurice John(1991), Austria Politics and Society Today, London : Macmillan. Frenkel Max, ed.(1977),     Partnership in Federalism, Bern : Peter Lang.
Fritz Plasser(1992), Peter a. Ulram and Alfred Graugruber, "The Decline of 'Lager Mentality' and the New     Model of Electoral Competition in Austria", Kurt Richard Luther and Wolfgang c. Müller(eds.),
West
    European Politics
, Vol.15,No.1, London : Frand Cass.
Gerlich P., Müller W.C. and Philipp W.(1988), "Potentials and Limitations of Executive Leadership : the
    Austrian Cabinet since 1945"
,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Research, Vol.16, pp.191-205.
Gerlich Peter, Grande Edgar, Müller C. Wolfgang(hrsg.)(1985), Sozialpartnerschaft in der Krise, Wien :
    Böhlaus.
Grant Wyn(1985), The Political Economy of Corporatism, London : MacMillan.
Josef H. kaiser(1956), Die Repräsentation Organisierter Interessen, Berlin.
Kurt Richard Luther and Wolfgang C. Müller, West European Politics(1992), London : Frank Cass.
Lacha Thomas(1976), Wirtschaftspartnerschaft in Österreich, Wien : Österreichischen
     Gewerkschaftsbundes.
Leo XIII.(1891), Rerum novarum.
OECD(1981), The Welfare State in Crisis : An Account of the Conference on Social Policies in the 1980s.
Pelinka A., Grande E. and Mueller W.C.(1988), "Corporatism in Crisis : Stability and Change of Social
    Partnership in Austria", Political Studies,
Vol.36,No.2,
Pius XI.(1931), Quadragesimo anno.
Luther K. R. and Müller W. C.(1992),
West European Politics, Vol.15, London : Frank Cass.
Powell G Bingham with Powell W. Lynda(1978),
"The Analysis of Citizen-Elite Linkage : Representation by     Austrian Local Elites", in S. Verba and L. W. Pye(eds.), The Citizens and Politics : A Comparative     Perspective, Stanford, C. T :Greylock..
Prager T.(1982), "Austria's 'Social Partnership' - A View From Within", Monthly Review, Vol.34, No.6.
Scholten I.,(ed.)(1987), Political Stability and Neocorporatism, London : Sage.
Schöpfer Gerald(eds.)(1980),
Phänomen Sozialpartnerschaft, Wien : Hermann Böhlaus Nacht.
Sully A. Melanie(1990), A Contemporary History of Austria, London : Routledge.
Sweeny J. and Weidenholzer J.(eds.)(1998),
Austria : A Study in Modern Achievement,
    Avebury,England:Gower.

뒤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