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건신학대학,「신학전망」제63호(1983),pp.102-122.

聖 토마스 아퀴나스의 福祉理念에 關한 硏究

목 차

Ⅰ. 서론                             Ⅳ. 정의와 평등
Ⅱ. 인간의 존엄성                Ⅴ. 공동선 사상
Ⅲ. 사유 재산권의 양면성                 Ⅵ. 결론

Ⅰ. 서 론

현대국가들이 한결같이 지향하는 것은 복지국가의 건설로서, 국가의 이념과 체제가 어떤 형태를 취하든 이러한 국가 목표는 모두가 동일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복지국가라고 하면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는 국가를 말하는데 사회보장이란 말은, 미국의 루즈벨트(F.D.Roosvelt)대통령이 1934년 6월8일 의회에서 뉴딜(New Deal)정책을 설명하는 가운데 처음 사용한 것으로 그후 1935년 미국의 Social Security Act와 1938년 뉴질랜드의 Social Security Act가 제정되면서 하나의 제도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사회보장제도는 세계각국으로 확산되어 오늘날 유럽 제국은 물론 개발도상국에까지도 널리 보급되어 있다. 그 개념은 사용하는 사람이나 국가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지만 그것의 이념과 성립사는 자본주의라고 하는 하나의 큰 흐름 속에서 고찰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영국에 있어서 1870년대 후반의 대불황과 실업증대, 1880년대의 활발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 등에 의한 사회 불안과 동요는 정부로 하여금 빈곤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하였고 구빈제도를 둘러싼 拔本的 논의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 또는 국가가 전체 국민의 생활보장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상이 하나의 제도로서 등장한 것은 영국의 구빈법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고 1601년의 구빈법에서 시작된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중세적 교회사상이 세속적 형태로 명문화된 것으로 불 수 있다.

영국 구빈법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빈민에 대한 세 가지의 전통적 구분이다. 즉, 강압적으로 단속해야 마땅할 멀쩡한 떠돌이, 거지, 구빈원(poor houses)에 수용해야 할 무능력한 빈민(노인, 장님, 허약자), 그리고 공공비용으로 생산적 노동에 종사시켜야 할, 일할 능력과 의사를 갖춘 극빈자가 그것이다. 이 계획은 지방의 본당(parish) 단위로 자체빈민을 적절히 처리하도록 책임을 맡기는 방식으로 시행되었는데 따라서 이 계획을 전반적으로 밑받침해 준 것은 기독교적 공동체 의식과 자선의 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보장제도를 공적제도라는 측면에 주안점을 두고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세의 종교적 자선제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이념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중세 서구사상을 대표하여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인간 존엄성과 생존권에 관계되는 사회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한 내용을 살펴보고 그것이 어떻게 근세 사회복지 또는 사회보장의 이념에 영향을 미치고 밑거름이 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인간의 존엄성

1948년의 제3차 UN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제22조에서는 사회보장의 이념을 다음과 같이, 즉 "어떠한 사람도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또 국가적인 노력과 국제적인 협력을 통해서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상응하여 자기의 존엄성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권리의 실현을 향유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민족과 국가가 달성해야 할 공통의 기준을 공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인권선언이 말하는 사회보장의 기본이념은 인간 존엄성과 평등의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인격존중은 그 근원이 유대 민족의 신앙에서 출발하여, 이를 이어받은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육성된 사상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다. 이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 이라는 사상이 그리스도교 인간관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이 근세에 있어서의 인격존중의 이념이 된 것이다.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을 쓸 때 제 1부에서는 신(神)에 대하여 논하고, 제2부에서는 신의 모상인 인간이 어떻게 하여 궁극의 목적인 신에 돌아가는가를 논하고, 마지막 제3부에서는 신과 사람을 매개하는 그리스도를 논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철저한 신중심주의의 표현이라 할 수 있으나, 인간인 그리스도가 토마스의 신학적 종합의 핵심이 되어 있음을 보면 인간중심적인 관점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그리스도교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 나가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 여기에 인간만이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인간 속에서 신성과 비슷한 것을 본다. 인간만이 그 사람 각자의 기량에 따라서 신의 모습을 나누어 가질(participate)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 가톨릭 사상은 이와 같은 이원론을 명백히 배척한다. 이 점에 있어서 토마스는 "인간이란 영혼과 육체가 합일한 것"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을 지지하고 있어 이원론 자라고는 할 수가 없다. "인간은 그 전 인간성에 있어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 토마스의 특유한 이념이었다. 인간은 마치 그 영혼이 없으면 인간이 아닌 것과 꼭 같이 그 육체가 없이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하나의 육신은 인간이 아니며, 그와 동시에 하나의 유령도 인간이 아니다."라고 체스터톤(G.K Chesterton)은 말하면서 "성 토마스는 한 인간의 영혼이 그의 영혼인 것과 같이, 그의 육체도 그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을 단호히 주장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오로지 그 두 가지에 의해서만 균형이 잡히고 통일되는 것이라고 하였다"고 함으로써 토마스의 일원론적인 입장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이란 창세기 1/26∼27의 말씀은 창세기9, 6의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는 말씀과도 통한다. 이 말씀에 따르면 동료 인간을 침해하는 자는 하느님 자신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죄로도 지워질 수 없는 하느님 모상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동료 인간을 돕는 행위는 바로 하느님을 돕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신약성서에서 더욱 구체화되어 나타나는데 마태오 복음 25/40의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정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는 말씀으로 명확해지고 있다. 그래서 성 토마스는 비록 이웃에 대해 선을 베풀지라도 그것은 자기 이웃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 계시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가졌기에 다같이 평등하며 존엄한 인격을 가졌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사상이 노예나 심지어 죄인들에게까지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구약의 사상은 원칙적으로 노예를 부정한다. 이 시대의 노예들은 대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전쟁포로요, 또 하나는 부채 때문에 노예로 팔려간 경우이다. 부채 때문에 노예가 된 자들은 안식년이 되면 해방될 권리가 있었다. 6년을 노예로 일하는 동안 그 부채를 모두 갚은 것으로 보고 그래서 7년째 되는 해에는 그를 석방해야 된다(출애 21/2-6). 만일 주인이 노예를 죽이면 주인도 살인죄로 처단 받고 상해를 입히면 그 노예는 석방해야 한다(출애 21/26이하). 그것은 노예에게 입힌 상해가 그 노예의 부채와 상쇄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함무라비 법전은 어떠한 경우에도 석방에 관한 언급은 없고 다만 상해를 입혔을 때는 노예의 매매 가의 일부를 변상하게 한 규정만 두고 있어 계약법전이 노예의 인권을 더 명백히 하고 있다고 하겠다.

구약시대에 일반화되어 있던 보복의 관습도 탈리온(Talion) 법에 의해 보복의 한계가 정해졌는데 이것은 보복허용이 아닌 보복제한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인류최초의 살인자로 낙인 찍하고 있는 카인이 그 아우 아벨을 죽이고서 하느님께 벌을 받을 때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하고 두려워하자 "그렇게 못하게 하여주마" 하시면서 누가 카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주고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잡아 살게 했다(창세 4/9-16). 이와 같이 범죄자를 보호할 뿐 아니라 아무런 원한 없이 과실로 사람을 죽인 자를 탈리온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도 어떤 장소를 지정하여 그 곳에 피난시켜 그들의 생명을 보전케 했다.

성서의 이러한 정신은 중세 교회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중세교회는 여러 방법을 통해서 많은 노예들과 예속 하에 있는 자들을 도와주고 후원해주었다. 에페소공의회(517년)에서는 주인이 자기 멋대로 노예들을 죽이는 일이 없도록 명했다. 특히 노예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으며, 더욱이 프랑스인들 중에서 노예로서 국외로 팔려 가는 것과 또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인과 이교도들에게 노예로 팔려가지 않도록 금지시켰다.

이때 교회가 도와주었던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 중에는 죄수들도 있었다. 사제들이 형무소를 방문하고 또 죄수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행위는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행해져왔던 것이다. 교회의 활동은 특히 죄수들을 위해 속전을 내도록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특히 민족이동기와 로마인들이 게르만인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시기에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성 세베리누스(St. Severinus)의 전기에 보면 많은 신자들이 바바리아 지방 사람들을 방문하여 죄수들을 먹이기 위해 그들로부터 십일조를 거두어들였다는 사실이 나타나는데, 이와 같이 교회는 고소를 당한 자들을 돌보아주었으며, 그들의 형벌을 조정하고 중재하여 가벼운 선고를 받도록 노력하였던 것이다.

중세 교회는 구약에 있어서처럼 교회 내에 성소를 마련해 두고서, 부당하게 쫓기고 있는 노예들이나 범죄자들이 피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피해자가 손해에 대한 보상을 포기할 경우에만 범죄자들을 그들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주인이 그 노예를 벌하지 않을 것을 맹세할 경우에 한해서 그들을 돌려주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비록 노예나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구약의 사상이 초기 교회에 전승되어 왔고,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에 와서는 더욱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토마스는 인간이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는데, 그 하나는 전적으로 은총의 선물인 인간의 본성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이며, 다른 하나는 공동선과 관련된 것으로 어떤 사람이든 비록 덜 착하고 배운 바가 적다 하더라도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음으로 해서 그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토마스가 말하는 은총의 선물이란 바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설사 공동선에 아무런 기여함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존재라 해도 그 본성 안에 가지고 있는 그 가치 때문에 사회적 가치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토마스는 비록 이웃에 대해 선을 베풀지라도 "그것은 이웃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 안에 숨어 계시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인간 존엄성에 대해 토마스는 결국,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은 본성 자체로서 존엄한 것이고, 아담의 범죄 후 종의 신분으로 추락되었던 인류가 성자의 降生으로 하느님을 아빠 -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의 신분으로 높여짐으로써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오늘날 사회복지라는 입장에서 인간을 볼 때도 죽은 후에 구원받을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원론적인 입장에서 "육체는 잘 말해서 영혼의 도구이고 나쁘게 말하면 영혼의 감옥이나 썩어버릴 무덤"으로 간주해서는 인간의 가치를 거기서 찾아볼 수 없고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인간 가치를 인간 본성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Ⅲ. 사유 재산권의 양면성

사회보장제도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소산이라고 할 때, 이는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기와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자본주의의 체제적 불안정세의 증대, 구조적 대량실업에 의한 국민생활의 전면적 궁핍화에서 출발한 것이다. 여기에서 자본주의 제국이 목표로 한 것은 완전 고용이었고 이것이 불가능할 때 사회보험으로 실업자를 흡수하고 노동 능력이 없는 극빈자를 대상으로 공적 부조를 시행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보장을 실시하는 방법에 있어 사회보험과 공적 부조가 두 지주가 되는데 이 양자는 모두 국가가 주체가 되어 막대한 재정을 관리함으로써 구현하는 것이다. 사회보험은 소득에 따른 보험금의 갹출과 일정한 비율의 보험혜택을 주는 것이고, 공적 부조는 세금이라는 형태로 자금을 염출하여 최저 생계비 미달의 소득자에게 대하여 일률적으로 무상의 혜택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회보장제도란 결국 재화를 국가가 주관하여 공익에 따라 재분배한다는 일종의 사유 재산권을 제한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사회보장이 국민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모든 국민은 어떠한 경우든 최저한도의 생활을 영위할 재화를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법에서의 소유권 사상에 있어 무한정한 절대적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고 비록 자신의 소유라 해도 공공복지에 적합하도록 행사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상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화의 공개념을 토마스는 자연법에서 기인한다고 하고 있다. 그는 "자연법에 의하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또 어떤 것도 자기 것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명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유의 분할이 자연법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합의에 의한 실정법에 입각한 것이다. 그런고로 재물의 사유는 자연법에 반대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자연법에 부가된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토마스는 "사유권에 관한 법은 일차적인 법이 아니고 이차적인 법인 제민족의 법, 즉 실정법의 일부분으로 이 실정법은 자연법에서 나온다"고 하여 일단 사유 재산권의 타당성은 인정하고 있지만 "인간이 범죄하기 전 낙원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공동소유를 누리던 상태였는데, 범죄 후 개인소유로 된 것은 공동소유가 무질서해진 상태로, 죄가 없을 때에 공동소유가 잘 되었다."고 함으로써 개인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이상적인 상태는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토마스의 이론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소유권이념은 私有共用이다. 무릇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하느님께로 귀속한다.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야훼의 것"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의 사용에 관하여 인간은 세상것들 위에 자연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 1,28)는 말씀대로 인간은 창조된 것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물이 창조된 것은 모든 사람이 이용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가진 자는 곤궁한 이를 구하기 위하여 진력하기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재산은 하느님의 집사로서 위탁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귀속되어 있기는 하나, 그 사용에는 의무를 수반하고 있다. 그것은 소유권에 이어지는 공동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토마스는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소위 극궁권(極窮權)을 유도해내고 있는데 즉, "필요할 때는 모든 것들이 공동재산이 되어서 타인의 재산을 취하는 것이 죄로 인정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필요에 따라 재산을 공동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한 개인은 공동체의 한 부분이므로 개인의 존재와 소유가 다 공동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법 학자들에 영향을 미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도 재산권에 관해서 토마스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즉, 자연질서에 따라 만물이 의인들에 의해서 공유되고, 사유재산은 죄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유재산이 정당화되는 것은, "그것은 죄의 치료로서 죄와 더불어 발생한 소유욕을 감소하여 서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설명하기를 "의인들에 있어서는 모든 물건을 공유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초대교회 신도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공용했다'는 기사를 읽는다 그러나 죄성이 계속 나타났다. 이 죄성의 한 형태는 탐욕을 벌하는 방편으로, 그리고 구제책을 마련하는 방편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국가라는 제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창조의 질서에 의해서 요청된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유재산은 절대적인 義의 제도가 아니라 상대적인 義의 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리스도교의 초대교회의 공동생활 모습을 보면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4/32-35)고 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아름다운 삶의 한 형태가 오늘날까지 계속되지 못한 이유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죄성(罪性)의 한 형태인 탐욕을 들고 있다. 인간의 탐욕은 무한한 것이고 무한한 탐욕의 제한을 위해서 타인의 소유권을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세상의 재화는 만인 공동의 것으로 어느 한 사람이 과도히 소유하면 다른 사람의 소유를 침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토마스도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는 자선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 신분이나 지위를 보전하는데 필요한 것까지 타인에게 줄 필요는 없다"고 논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다만 얼마만큼이 그 신분에 맞는 정도냐 하는 문제와 그 신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첫째 문제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고 둘째 문제는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신분에 덧붙여 노력을 쌓아서 그 사람의 지위가 완성되는 경우이고, 둘째는 상속에 의하여 신분이 정해지는 경우, 그리고 셋째는 재산을 취득하고 이를 축적함에 의하여 지위를 쌓는 경우이다. 첫째의 경우에는 그 지위는 일단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둘째의 경우에는 일정한 한계를 설정해서 인정하지 않으면 폐해를 초래할 염려가 있을 것이다. 셋째의 경우에는 재산이 권력을 형성하고 권력이 재산을 모아서 멈출 줄 모르는 위험이 있다. 특히 社會運勢에 편승해서 이룩된 재산이라면 질서를 문란 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사회로 환원시켜 공동선에 공헌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결국 중세 교부들의 사상은 부의 편재에 대항해서 소유권 사상을 전개하면서 모든 사람이 재산을 나누어 가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19세기에 들어와서 근대적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유 사상과 어울려 소유권 절대자유의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고 결국은 인간사회를 소수의 유산계급과 절대 다수의 무산계급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 시켰다. 절대빈궁자에 대한 구제는 오로지 가진 자들의 자비심에만 의존하게 되었고, 극단적인 곤경에 처한 이들, 가난한 대중들을 상대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팽배해지게 되었는데 이때 교회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전 세계에 선포하였으니, 그것이 1891년 5월 15일에 반포한 레오 13세의 유명한 회칙「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이다. 그후 1931년 5월 15일 교황 비오 11세는 「레룸 노바룸」반포 40주를 기념해서 발표한 회칙「꽈드라제시모 안노」(Quadragesimo Anno)에서 사유 재산권의 폐지가 근로계급에 대하여 오히려 해가 된다는 점을 명백히 지적하였으니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사유 재산권은 근로계급 즉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재삼 강조하여 설명한 것이다. 즉 "나는 먼저 사유재산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나의 선임자가 당시의 사회주의에 반대하여 사유재산의 폐지가 근로 계급에 대하여 이익이 되기는 커녕 도리어 최대의 불행이 된다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얼마나 강력하게 사유 재산권을 옹호하였는지는 여러분이 잘 기억하는 바"라고 하면서 "레오 13세나 또는 교회의 교도와 지시 하에 있는 신학자들이나 이때까지 한 번도 소유권의 이중성격, 즉 타인적 방향과 사회적 방향, 또는 그 개인의 행복을 위한 방면과 공동의 복리를 위한 방면을 부인한 적도 없었고 의심한 적도 없었다"고 했다(꽈드라제시모 안노2장 17절).

결국 사유재산권이란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공공의 복지라는 입장에서 제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회제도로서 사회보장의 여러 방법적 제도가 생기기 전 초대 교회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그렇게 살았으니 지상의 재물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데는 물론, 재물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동으로 쓰라고 하느님이 만드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재화의 소유를 하나의 덕으로 여기던 풍조에 반해서 재화를 나누어 누리는 것을 덕으로 여기면서 살았던 것이다.

Ⅳ. 정의와 평등

오늘날의 사회문제는 두 가지 면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인간 평등의 관념에 입각한 사회문제이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인 이상 살고자 하는 욕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즉 생존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하는 사회문제다. 이러한 사회문제는 자유자본주의 사회의 자체 모순에서 야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어떠한 사회도 그 자체 내에 모순이 있게 마련이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문제는 그들 각 사회제도 내지 생활양식에 의해 규정된 독자적인 방법에 의해서 해결되어왔다. 마찬가지로 국가 독점 자본주의 시대에 나타난 빈곤의 일반화가 이 시대의 사회문제의 특징이며 이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대책으로서 등장한 것이 사회보장제도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하나의 법적 현상으로 나타난 기본적 인권 사상이 경제생활의 영역에까지 확대된 것으로 소위 생존권적 기본권이라고 하는 새로운 권리가 실정법 체계에 규정된 것이다. 이 생존권적 기본권은 자본의 독점화로 인한 빈곤의 일반화의 결과로서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경제 생활면에서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요구, 즉 "인간다운 생활"을 하고자하는 요구를 사회적인 권리로 주장하게 되었으며 국가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국민의 생존권을 구체적으로 구현시키기 위한 제도로서 나타난 것이 사회보장제도인데 일반적으로 사회보장의 경제적 기능으로서 지적되는 점은 소득의 재분배이다. 사회보장은 경제활동에 의해서 분배된 부를 사회적으로 재분배하는 시스템이며 그 방법으로서 사회보장 급부와 갹출이라는 기구를 통해서 실시된다. 결국 이러한 제도는 부의 편재를 막고 빈곤으로 인해 기본권적 인권으로서의 생존권이 침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교황 비오 11세는 그의 회칙 「꽈드라제시모 안노」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소유권과 사용권의 구분을 철저히 지키고 자기 본래의 소유의 한계를 넘어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은 소위 교환적 정의의 명하는바"(제18절)라고 하면서 "인간은 자기의 잉여소득-즉, 자신의 생활을 적당하고 아름답게 유지하고도 남은 소득-을 자기 임의로 처분할 권리는 절대로 없다. 그러나 큰 소득이 노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 노동이 참으로 유용한 재화의 생산을 가져온다면 그것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리에서 연역하여 말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훌륭한, 또 특별히 우리 시대의 필요에 적당한 偉德이라 아니할 수 없다"(제20절)고 했다. 다시 말하면 소유권이 비록 절대적인 권리라 하더라도 그 소유와 행사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으로 후자 즉 행사는 그때 그때의 경우에 있어서 정의가 명령하는 조건이나 제한을 받는 것이다.

토마스는 개인의 가치와 관련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평등의 문제라고 하고 있다. 그는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다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평등을 말할 때 토마스는 산술적 의미보다는 기하학적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즉 평등은 량에 의존하지 않고 비례에 의존한다는 말이다. 평등은 좁은 의미로 균등한 분배보다는 한 개인이 공동체에서의 자기 위치의 중요성이나 혹은 공익에 대한 자기의 공헌에 따라 보답을 받을 때 성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평등은 개개인이 동등하게 취급될 때 시행되는 것이 아니고 개개인의 경우가 정의와 공익을 바탕으로 하여 결정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의(Righteousness)라는 말은 오늘날 흔히 법률적 의미만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원래 희랍 저술가들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예컨대 플라톤이 「공화국 또는 義에 관하여」라는 대화록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그는 義라는 말을 직접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사회의 이상적 善이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플라톤에 있어서 義의 개념은 법률적인 개념이라기보다 도덕적인 개념(최고의 경지에서는 종교적인 개념으로 바뀌어지는)이었다. 플라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로 사도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사도 바울로는 그와 같은 의미로 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교환에 있어서의 정의(Communitative Justice)라는 관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교환되는 사물의 가치가 실제로 동일할 것이 요구되었다. 다시 말하면, 가치가 동일한 사물이 서로 교환될 때 정의가 보장된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보완했다고 볼 수 있는 토마스의 정의관은 비례적 평등을 정의라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은 정의에 대한 사상은 멀리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줄곧 나타나는 하느님 야훼의 義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통에서 독특한 점으로 나타나는 과부와 고아, 그리고 빈민과 뜨내기들에 대한 배려는 계약법전과 신명기계 율법에 대표적인 법조문이 나온다. 이와 같이 사회에서 보호처가 없는 이들에 대한 배려는 사회적 안녕을 이루는 데만 목적이 있는 계명이 아니라 압제받는 이들의 보호자로 자처하시는 야훼의 성품에서 비롯하는 계명인 것이다. 이와 같은 명령에 따라 예언자 아모서는 당대의 부유층과 착취자들을 엄히 규탄한다. 그들의 불의가 실제로 그들이 야훼께 드리는 예배를 쓸모 없이 만들어 버린다고 단언한다. 인간이 바치는 경신례, 즉 순례절이나 축제의 기능도 결국은 강물과 개울이 넘쳐흘러 그 땅에 풍년이 오고 생활이 풍성해지기를 비는 것인데 아모스는 정의가 없이는 인생 전체가 메마른 것임을 야훼의 이름으로 시사한다.

야훼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주의가 깊으신지, 야훼께 대한 신앙은 곧 정의를 시행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이사야 31장과 예레미아 22장의 성서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신앙의 진수, 즉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예배함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예레미아서 22장에서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국왕에게 전하라는 명을 받는데, 이 구절은 참다운 예배란 곧 정의를 실천하는 것임을 단언한 구약의 가장 강력한 발언이라 하겠다.

여기서는 이론과 실천, 신앙과 정의가 구분되지 않는다. 정의라는 것은 구체적인 것이다 가난한 자를 착취하지 않음과 그들의 인격을 세워주는 종교신앙의 본질이다. 정의 실천이 빠지면 하느님은 여전히 모르는 분으로 남아 계신다. 따라서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부류들-빈민, 과부, 고아, 뜨내기들-이 사회 전체의 정의가 얼마나 철저한지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그 부류들이 착취당하고 망각되고 압제받는 한,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도, 그분에 대한 지식도 있을 수 없다.

바빌론 귀양살이부터 예수님 시대가 오기까지의 중간 시기에 정의 개념이 어떻게 통용되었는지 살펴보면 유대 세계에서의 정의 개념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음은 물론 신약성서의 정의관의 배경을 알 수도 있게 된다. 이 시기에 정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와 희랍어 번역 용어들은 상당히 정의의 폭을 넓혔다. 이때의 정의는 여러 가지 덕목들, 즉 용기, 인내, 자제심, 가난과 질병 중의 꿋꿋함, 지혜와 지식 등과 긴밀하게 연관되거나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정의의 옛 관념이 이 시대에 보인 변천 중에 하나의 색다른 점은 이 단어가 자선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자선을 의미하는 정의는 우선 토비트서 1/3; 12/8-9: 14/11 등에서 엿볼 수 있고, 희랍어본 집회서에 "자선은 죄를 없앤다"(3,30), "기도드릴 때 신뢰심을 잃지 말고 자선을 베풀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라"(7,10)는 구절에서 히브리어본의 義를 그렇게 옮겨 놓은 것이다. 라우터바흐( J. Lauterbach)는 이 같은 변천의 의의를 논하면서 후기 유대교에서는 자선과 이웃에 대한 배려가 단지 사랑의 너그러운 표시에서 그치지 않고 정의에서 오는 본분으로 간주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이 나온 근거는 구약성서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과 가난한 이와 고아와 과부와 더부살이들에 대한 배려를 동일한 것으로 보던 사상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말에서 잘 간추려져 있다 ; 곤궁한 이를 돕는 것이 곧 정의다(Justitia est in subveniendo miseris).

이러한 성서 사상은 대단히 중요한 일면을 우리에게 밝혀주는데, 그 일면은 후대에 정의와 사랑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면서부터 흐려지고 가리워지고 말았다. 즉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노력은, 사랑이니 동정이니 하는 것에서 비롯하기보다는 정의의 요청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루가는 오늘날 말하는 사회정의에 가장 관심이 컸던 복음사가이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은 구약 예언자들의 말투를 빌어 당신 교회에 정의를 외친다. 이것과 연관된 행동이 루가복음 전편에 흐르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성서의 일반사상을 보건대 부가 나쁜 것으로 간주되는 일이 있다면 두 가지 근거에서이다. 하나는 부가 타인을 억누르는 지배력의 바탕이 될 때와 다른 하나는 부를 소유한 그 인간을 사로잡을 때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토마스는 "각 사람은, 물론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재산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자기 신분이나 지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까지 타인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신분이 어떻게 해서 얻어진 것이냐 하는 문제를 따지고 있다. 즉 첫째는 자기의 주어진 신분을 바탕으로 노력을 쌓아서 이룩한 지위로, 이 경우는 일단 정당한 것으로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둘째는 상속에 의해서 신분이 결정된 것으로, 이 경우는 일정한 한계를 정해서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오늘날 상속세 등을 불로소득세로 보고 높은 세율을 부과하는 것은 이러한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는 재산을 취득하고 이를 축적함으로써 얻어지는 지위로, 이 경우는 재산이 권력을 낳고 권력이 재산을 모으는 소위 부익부의 악순환을 초래해서 큰 사회악을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토마스는 둘째의 경우는 일정한 한계를 설정해서 인정하지 않으면 폐해를 초래할 염려가 있고, 셋째의 경우에는 질서를 문란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그 대부분을 사회로 흡수시켜 공동선에 공헌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했다. 어쨌든 토마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특권을 가질 수 없다."는 만인 평등의 원칙을 선언했는데 오늘날 사회복지의 이념도 결국 경제적 최저생활의 보장에서 재물을 일정한 원리에 따라 평등하게 재분배함으로써 구현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회적 신분에도 관계없이 평등한 대우를 받기를 요구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토마스의 평등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Ⅴ. 공동선 사상

토마스의 공동선 사상은 "인간이 선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의 복지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도덕이란 그것이 공동복지에 일치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된다." 는 사상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회의 목적은 그 사회의 공동선(common good)이며, 개개인의 이익은 아니다. 또 사회를 구성하는 각인각양한 이익의 총화도 아니다. "따라서 사회는 공동목적을 위하여 조직된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할 때 그 공동목적을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토마스는 이 목적을 공익이라고 보고 이 공익은 인간의 자연적 지식을 통하여 알려진 것인 동시에 하느님의 뜻 속에 표명된 것, 즉 계시라고 하고 있다. 토마스는 사람의 자연적인 사회적 조건과 함께 명백한 교회의 명령이 사람이 정치적 공동체를 섬길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고 느꼈다. 사회적 책임이 모든 공동체의 토대이며 그것은 진리, 정의 및 개인들의 행복에 토대를 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시민 가운데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공익은 국가의 존재와 행위를 위한 자연적인 토대이며 국가가 그 자체의 목적수행에 있어서 실행하는 법률들의 정의의 시험이다. 그래서 국가는 공익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사람의 현세적 요구들이란 물질적으로 유족한 생활을 말하며 이를 위해 사람의 육체적 요구들과 조건들을 공급함으로써 국가는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보편적 행복을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여기서 국가가 사람들의 현세적 삶을 풍족하고 행복하게 돌보기 위해서 유한한 재화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어렵게 대두되고 있다. 토마스에 의하면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소유권의 이념은 사유공용이다. 다만 인간의 욕망 때문에 야기될 수 있는 혼란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인정할 뿐 재물의 관리와 분배를 적당하게 행해야 한다. 가진 자는 남의 곤궁을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으로 자기가 가진 재산은 하느님의 정의대로 사용하도록 하느님께로부터 위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내 것이라 해도 내가 마음대로 쓸 수가 없고, 그 사용에는 의무를 수반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공동선이다. 그래서 토마스는 "공동선이란 하나의 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신적인 것"이므로 공동선이 개인적인 선보다 더욱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선은 궁극적으로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

성 암브리시오(St. Ambrosius)도 말하기를 "그대가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그대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사용하도록 주어져 있는 것을 그대가 가로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는 무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있는 자 만의 것은 아니다"고 했다.

교황 바오르 6세는 1967년 3월26일에 반포한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Populorum progressio)에서 소유권이 절대적 또는 무조건의 권리는 아님을 강조하여 누구라도 타인이 필요한 것에 부족을 느끼고 있을 때에 자기에게 불필요한 것을 점유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소유권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공동선에 반대하여 이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

토마스에게 있어서는 이 점이 매우 강경하게 표현되고 있다. 토마스는 "세상의 온갖 것이 사람 모두의 생활을 위하여 이용되는 것은 자연법에 합당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곤궁한데도 자기만이 풍족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연법에 위배되는 일이다. 만물은 만인에게 공통이다"고 했다. 이와 같은 원칙 하에서 토마스는 극궁권(極窮權)을 전개해 나간다. 즉 도둑질을 하는 것은 보통의 경우에는 타인의 소유권을 침해하여 정의에 배반하는 죄이지만 곤궁이 긴급하고도 명백하여 옆에 있는 물건을 충당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목전의 위급(危急)을 구제할 수 없음이 분명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하거나 또는 공공연하게 타인의 것을 훔쳐서 자기의 곤궁을 구해도 좋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사(餓死)지경에 이른 경우에는 타인의 빵을 빼앗아 먹어도 절도죄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곤궁한 이웃을 구하기 위하여 타인의 것을 취하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인간의 생존권과 소유권이 충돌할 때는 생존권이 우선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소유권 사상이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격심한 빈부의 격차를 초래하여 현대사회에 있어서 갈등과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의 재산 중에는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계에 절대 필요한 것과, 신분에 상응하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과, 더 나아가서 그 이상의 잉여에 속하는 것이 있다. 물론 재화가 모든 사람의 공용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성에 따라 질서를 밟아서 그 사용을 결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재물을 관리 분배하는 소유자와 재물의 사용을 수락 받는 자와 쌍방의 사정을 참작하여 완급(緩急)을 고려하여 최선의 방법에 의해서 최선의 용도에 충당하여야 한다. 남들은 생활유지에 필요한 것도 없는데 자신에게 필요한 이상의 재화까지를 자신을 위해서 독점해 둔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부당한 일이다. 그래서 교황 바오르 6세는 공공복지에 해를 끼치면서까지 사유재산권이 구사(驅使)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면서 개인의 기득권과 공동체의 기본요구 사이에 충돌이 생긴다면 개인과 사회단체들의 협력을 얻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국가 권력의 책임이라고 했다. 이러한 국가책임 아래 공동선을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회보장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현대 교회도 이러한 제도를 적극 지지하고 권장하고 있다. 즉 교황 요한23세는 1961년 5월 15일에 반포한 유명한 회칙「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에서 사회보험과 사회보장제도는 한 국가의 전체 수입을 정의와 공평의 기준에 의하여 재분배하는데 유효한 공헌을 회복하는 도구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국민의 복지를 위한 국가의 책임은 토마스도 인정했는데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여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정치학은 그 목적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하는 실용적 기술이 되었고 그 안에서는 사회의 복지가 개인의 주장을 무시하는 것이 덕스러운 사회생활로서 규정되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법은 그 주요 형태가 평화로서 나타나는 공공의 복지를 추구하기 위하여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제왕은 공익을 확대하기 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임명되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수호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토마스가 말하는 제왕의 책임은 오늘날 국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동선은 사회나 국가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있어서도 의무이며, 또 개인의 공동선에 대한 이해와 협조가 없이는 국가나 사회도 이를 잘 수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인 공동선 수행은 자선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초대교회 때부터 자선을 권장한 많은 교부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지만 교부들은 자선을 강조한 나머지 자선은 죄를 보상 할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효과를 얻는다고 했다. 그래서 자선은 그 자체로서 의무라는 면보다 공을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사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토마스는 "이웃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곧 자선이요 자선을 행함으로써 자기 죄를 보상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자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선 때문에 행해야 한다고 하여 자선의 의무성 또한 강조하고 있다.

Ⅵ. 결 론

지금까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인간존엄성, 사유재산권, 정의와 평등의 사상, 그리고 공동선 사상 등을 살펴보고 토마스의 이러한 사상들이 성서와 그 외 몇몇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어떻게 표현되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교회와 사회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제 토마스의 이와 같은 사상이 오늘날의 사회복지 또는 사회보장제도의 이념 속에서는 어떻게 나타나 있고, 또 발전되어가야 할 것인가를 검토해보고 결론을 맺고자 한다.

1) 토마스는 인권사상에 대해서 인간을 영혼과 육체를 구분해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는 일원론적인 입장을 취했고, 이 인간은 신성을 닮은 영혼 때문에 어떠한 인간도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점에서 근대적 복지이념의 바탕이 되는 어떠한 조건을 가진 인간이라도 꼭같이 존엄한 인권을 가졌다는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2)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사유(私有)공용(共用)이라는 소유권의 양면성은 근대 헌법에서 생존권적 기본권 사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근대헌법에서 생존권이 국민 각자의 권리로 인정되고 있는 한 지상의 자원은 무한한 인간의 욕구 앞에서 어떤 형태로든 제한받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제한을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조치로 생존권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권리란 언제나 다른 편에 대한 의무를 요구하고 있다는 양면성으로 볼 때 생존권도 경제적 약자에게 있어 권리로 인정된다면 강자에게는 의무라는 형태로 제한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토마스는 인간에게 있어서 산술적 평등을 정의라고 본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은 자기신분이나 지위에 합당한 처우를 받는 이른바 비례적 평등을 정의라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복지국가에서 말하는 평등은 기회의 균등을 말했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결과의 차등을 유발해 왔다. 따라서 사회복지 또는 사회보장은 이러한 균등한 기회의 경쟁에서 낙오되는 사람들을 최저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가는 토마스의 평등사상에 따라 복지국가의 목표는 최저한도의 생존을 유지한다는데 머물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재분배하는데 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선진 각국의 사회문제가 절대적 빈곤에 있다기보다 상대적 빈곤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처음에는 구빈정책 이라는 최저생활 보장에서 오늘날에는 빈부의 격차가 없는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한다는 소득재분배 정책으로 지향해 나가고 있다.

4) 이와 같이 앞으로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모든 나라들이 설정해야 할 목표는 평등과 일치에 두어야 할 것이다. 현대 과학의 발달도 무한한 가능성 속에 새로운 희망을 인간들에게 안겨주지만 이러한 기술의 발달에서 오는 복지와 그 혜택이 일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가서는 안될 것이다. 동양의 공자도 나라와 가정은 부족함을 근심하기보다는 고르지 못함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기보다는 평안치 못함을 근심하라(국가國家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論語 季氏十六)고 했는데 결국 행복은 일치에 있고 일치는 평등과 정의, 곧 성 토마스가 말하는 공동선을 구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참 고 문 헌

가톨릭출판사.「사회정의―가톨릭의 입장」. 1976.
고대대학원 서양중세사연구실 편역. 「서양중세사회경제사론」. 서울 : 법문사, 1981.
김증한.「신물권법」.서울 : 법문사, 1963.
김진목.「한국사회보장론」서울 : 박영사, 1982.
김한주.「한국사회보장론」. 서울 : 경문사, 1981.
신만중.「사회보장정책론」. 부산 : 복지출판사, 1980.
신수식.「사회보장론」. 서울 : 법문사, 1978.
이해남 편역.「사회질서의 대헌장」. 서울 : 경향신문사, 1948.
장 훈. "사회보험법의 생성과 발전", 이종하화갑논문집: 「사회법의 제문제」, 서울: 박영사, 1973.
지동식·이장식·김규영외 편역. 「서양중세사상론」.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1.
최문환.「근세사회사상사」.서울 : 삼영사, 198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稻垣良典,「현대ヵトリツズムの사상」, 정종휴·정종균역,「현대가톨릭시즘의 사상」, 서울 : 박영 사, 1980.
飯島幡司.「キリスト교の사회관」, 조기훈 역,「그리스도교사회관」. 서울, 가톨릭출판사, 1973.
小山男路·佐口卓.「사회보장론」. 동경 : 유비각, 1981.
平田淸明 역.「사회사상사」, 장하진 역.「사회사상사」. 서울 : 한울사, 1982.
大河內一男.「사회사상사」,노태구 역.「사회사상사」.서울 : 백산서당, 1982.
St. Thams Aquinas. THE SUMMA THEOLOGICA. Trans. by the English Dominican fathers, 4vols, The           University of Chicago, 1975.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12Vols,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 the Free           press, 1972.
Pope John 23. Mater et Magistra. 1961, 이해남 역.「어머니와 교사」.서울: C.C.K, 1964.
Pope Paul VI. Populorum Progressio. 1967, 김남수 역.「민족들의 발전촉진에 관한 회칙」. 서울: C.C.K, 1964.
Copleston F. C. AQUINAS, 강성위 역.「토마스 아퀴나스」.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82.
Chesterton G.K. Saint Thomas Aquinas "the Dumb Ox." New York: Doubleday & Company, Inc., 1956.
Maritain J. Man and the State, 한용희 역.「인간과 국가」.서울: 가톨릭출판사, 1978.
John C. Hanghey. S.J. The Faith that dose Justice, 성념 역.「정의를 실천하는 신앙」.왜관: 분 도출판사, 1980.
Joseph Gremillion. the Gosepel of peace and Justice, 한용희 역.「정의와 평화의 복음」.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79.
Furniss N., Tilton T.. The Case for the welfare State, 김한주·황진수 역.「현대복지국가론」. 서울 : 고려원, 1983.
Tanncy, R. H. Religion and the Rise of Capitalism, 김종철 역.「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서울 :한길사, 1983.
William W, Hans. Anthropologie des Alten Testaments, 문희석 역.「구약성서의 인간학」. 왜관 : 분도출판사, 1976.